해마다 10월 8일이나 9일에 드는 절기. 백로의 이슬이 빛깔이었다면 한로의 이슬은 온도다. 기러기는 손님으로 오고, 풀과 나무가 다 진 뒤 국화만 홀로 핀다. 들은 타작이 한창이고, 타작 점심상에는 배춧국과 무나물이 오른다.
새벽에 트럭 문을 열면 손잡이가 젖어 있다. 백로 무렵에도 그랬다. 그때는 젖기만 했는데 이제는 젖은 손이 시리다. 이슬은 그대로인데 이슬의 온도가 달라졌다.
해마다 10월 8일이나 9일에 드는 절기, 한로(寒露)다. 올해는 10월 8일 오후 3시 29분에 든다. 24절기 중 열일곱 번째, 찬 이슬이라는 이름의 마디.
찰 한(寒)은 뜻을 모아 만든 글자다. 집 면(宀) 아래 사람(人)이 있고, 그 사람을 풀(茻)이 위아래로 덮고, 맨 아래에 얼음(冫)이 깔렸다. 『설문해자』는 이 글자를 “언 것(凍也)”이라 풀고, 사람이 집 안에서 풀을 깔고 덮은 채 그 아래 얼음이 있는 모양이라 적었다. 추워서 풀더미 속에 몸을 묻은 사람의 그림이다. 이슬 로(露)는 백로 편에서 풀었다. 원나라 문헌 『월령칠십이후집해』는 한로를 이렇게 적는다. “구월의 절기다. 이슬 기운이 차가워져, 곧 엉기려 한다(九月節 露氣寒冷 將凝結也).” 백로의 이슬은 빛깔로 말했고, 한로의 이슬은 온도로 말한다. 엉기면 서리다. 그 이름이 다음 절기다.
옛사람은 이 보름을 세 마디로 셌다. 기러기가 손님으로 오고(鴻鴈來賓), 참새가 큰물에 들어 조개가 되고(雀入大水爲蛤), 국화에 누런 꽃이 핀다(菊有黃華). 첫 마디의 賓이 재미있다. 『집해』는 백로에 먼저 온 기러기를 주인(主), 한로에 뒤따라 온 기러기를 손님(賓)이라 갈랐다. 같은 새인데 오는 차례로 자리가 다르다. 셋째 마디에는 이런 풀이가 붙었다. “풀과 나무는 다 양(陽)에서 꽃을 피우는데, 국화만 홀로 음(陰)에서 꽃을 피운다(草木皆華於陽 獨菊華於陰).” 다른 꽃이 다 진 뒤에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우리 기록도 같다. 『고려사』 역지(曆志)는 선명력을 소개하면서 한로를 구월의 절기로 놓고, 기러기가 손님으로 오고 참새가 큰물에 들어 조개가 되고 국화에 누런 꽃이 핀다고 적었다.
들녘은 타작이 한창이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한로 무렵의 일을 이렇게 적는다. 여름새와 겨울새가 자리를 바꾸고, 오곡백과를 거두고, 타작이 한창이다. 속담도 남았다. “가을 곡식은 찬 이슬에 영근다”,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간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구월령은 이 두 절기를 한 줄에 묶어 열었다. 구월이라 늦가을이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느냐, 창공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한다. 그 뒤로는 온통 타작 이야기다. 들마당 집마당에 개상과 탯돌을 놓고, 젊은이는 볏단을 태질하고, 아이는 소를 몰고, 늙은이는 섬을 싸매고, 이웃집이 힘을 합쳐 제 일처럼 한다.
음력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이 이 보름 안에 든다. 올해는 10월 19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로 무렵의 풍속으로 국화전을 지지고 국화술을 담그는 일을 적고, 붉은 수유(茱萸) 열매를 머리에 꽂아 잡귀를 물리치던 일을 함께 적었다. 당나라 두보의 시에 “내년 이 모임에 누가 성할지 알겠는가, 취하여 수유를 손에 들고 자세히 본다(明年此會知誰健 醉把茱萸仔細看)”는 구절이 남아 있다. 『농가월령가』 구월령도 같은 날을 두고 노란 국화가 가을 빛깔을 뽐내니 구구절 좋은 날에 꽃부침개로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시의전서』가 국화는 많이 얹으면 쓰다고 적은 그 화전이다.
부엌 쪽 이야기를 해야겠다. 『농가월령가』 구월령의 타작 점심상은 이렇다. 새우젓 계란찌개를 벌어지게 차려 놓고, 배춧국 무나물에 고춧잎 장아찌라. 이백 년 전 상인데 낯설지 않다. 요즘 타작은 콤바인이 반나절에 끝내고 점심상도 그만큼 단출해졌지만, 배춧국과 무나물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가을무와 배추가 이 무렵부터 국과 나물로 상에 오르고, 한 달 뒤에는 김장독으로 들어간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한로와 상강 무렵의 시식으로 추어탕을 적었다. 미꾸라지 추(鰍) 자에 가을 추(秋)가 들어 있어 흔히 가을 고기라 풀지만, 秋는 소리를 빌린 자리다. 글자가 아니라 때가 가을을 말한다. 추수를 마친 논에서 미꾸라지를 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추어죽 편에 따로 적어 두었다.
다음 절기는 상강(霜降), 올해는 10월 23일이다. 기운이 엄숙해지고 엉겨, 이슬이 맺혀 서리가 된다(氣肅而凝 露結爲霜矣). 한로의 이슬이 그대로 얼면 상강이다.
『신농본초경』은 국화를 두고 오래 먹으면 몸이 가볍고 늙음을 견딘다(久服輕身耐老)고 적었다.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다 진 뒤에 피는 꽃이라서 사람들은 그 꽃을 술에 띄우고 전에 얹었을 것이다.
이슬은 백로에서 한로까지 한 달을 두고 천천히 식었다. 기러기는 차례로 오고, 국화는 남들이 다 진 뒤에 핀다. 늦게 오는 것과 늦게 피는 것이 이 절기의 손님이다.
참고: 절기 시각은 한국천문연구원 24절기 입기 시각 자료, 寒의 자의는 『설문해자』, 삼후와 한로의 자의는 『월령칠십이후집해』(한로·상강 항목), 『고려사』 역지 인용·농사·속담·시식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한로 항목), 중양절 풍속과 두보 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로 항목), 『농가월령가』 구월령은 한국국학진흥원 현대어 풀이를 따랐습니다. 국화의 한 줄은 『신농본초경』 상품(上品) 국화 조목(久服利血氣 輕身耐老延年)입니다. 절기 날짜는 해마다 하루 이틀 움직입니다.
이 계절, 더 깊이
- 추분(秋分) — 반을 지나는 날, 우레가 소리를 거둔다
- 화전 — 진달래는 많을수록, 국화는 적을수록
- 추어죽(鰍魚粥) — 가을 논이 내준 백성의 보양죽
- 24절기 — 한 해의 마디마디 — 시리즈 길잡이
2026.10.08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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