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그릇의 윤리 — 가격·산지·신뢰

    한 그릇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우리는 세 번 정직해야 한다. 식탁에 한 그릇이 닿기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길다. 한 알이 자라는 시간, 그 알을 골라내는 손, 그 손이 가격을 매기는 자리, 그 가격이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의 동선. 그 동선의 어느 자리에서든 정직하지 못하면, 한 그릇은 결국 식탁에 닿지 못한다. 쿡톡이 운영을 시작하며 결정한 세 가지 약속이 있다. 가격,…


  • 산지에 다녀와서 — 의성의 한 마늘 농가

    한 알의 단단함은 한 사람의 새벽에서 온다. 의성으로 가는 길은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됐다. 차 안은 아직 어두웠고, 라디오에서는 흙냄새 같은 트로트가 한 곡 흘렀다. 운전대를 잡고 가는 동안, 나는 이번에 만날 어른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통화로만 닿아 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조금 두근거린다. 한 가족의 한…


  • 봄을 위로 세우는 자리 — 죽순

    하루에 한 뼘씩 자라는 자리 — 봄은 위로도 자란다. 봄에 흙을 들치고 올라오는 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죽순은 자라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새벽에 한 뼘이던 것이 저녁이면 두 뼘이 되어 있다고들 한다. 한 마디씩 솟아오르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죽순은 봄의 다른 형식이라 부르고 싶다. 다른 봄나물이 흙을 옆으로 펴는 것이라면, 죽순은 봄을 위로 세우는…


  • 음식, 그 너머의 이야기 — 땅이 짓고, 사람이 잇다

    “한 알의 열매 뒤에는, 누군가의 새벽이 있습니다.” 어느 저녁의 기억 어릴 적, 할머니 부엌에서 나던 냄새를 기억하시나요. 장작불 위에 올린 찌그러진 냄비에서 뽀글거리던 된장찌개. 뚜껑을 여는 순간 얼굴로 훅 밀려오던 김. 손가락으로 집어 먹던 뜨거운 밥알. 호박잎 위에 얹은 노릇한 고등어. 그 냄새는 그냥 ‘냄새’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은 계절이었고, 목소리였고, 기억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느 저녁 길을…


  • 흙과 가장 가까운 잎 — 냉이

    냉이는 흙을 등지고 자라지 않는다. 3월 중순쯤 시장 한쪽 좌판에 냉이 한 무더기가 놓이기 시작한다. 흙이 묻은 뿌리가 서로 얽혀 있고, 잎은 작고 들쭉날쭉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흙 한 무더기처럼 보이는데, 손으로 쥐어 보면 그 안에 푸름과 향이 차곡차곡 닫혀 있다. 냉이는 흙을 등지고 자라지 않는다. 흙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봄을 모은다. 어릴 적 어머니의…


  • 흙을 뚫고 올라온 첫 향 — 쑥

    흙을 뚫고 올라온 첫 향, 쑥. 3월의 첫 비가 지나가면 어머니는 자주 마당 한쪽 흙을 들여다보셨다. 거기에 쑥이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다음 날엔 두 마디. 한 일주일이 지나면 광주리 하나가 차올랐다. 어머니는 그것을 캐서 부엌으로 가져오셨고, 그날 저녁이면 부엌에서 쑥 향이 흘러나왔다. 봄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쑥국 한 그릇은 늘 짧게 끓인다.…


  • 겨울 끝의 한 줌 — 시금치

    가장 추운 자리에서 자라는 잎이 가장 다. 겨울이 끝나가는 어느 새벽, 시장에 시금치 한 단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짧고 단단한 잎, 흙이 묻은 뿌리, 굵게 갈라진 줄기. 익숙한 시금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포항초, 또는 남해초라고 부른다. 겨울에만 시장에 나오고, 봄이 오면 사라지는 잎이다. 이 짧은 시기에만 시금치는 자기 본래의 단맛을 입는다. 어릴 적 어머니의…


  • 엄마의 김치냉장고에는 왜 늘 무언가가 더 있을까 — 마음이 보관되는 곳

    엄마의 김치냉장고는 음식 보관소가 아닌, 마음 보관소입니다. 냉장고 한 칸 한 칸에 담긴, 엄마의 언어에 대한 에세이.


  • 붉어지는 법을 배운 겨울

    겨울의 마지막 어귀, 냉장고를 열면 오래된 등불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붉은 딸기 한 팩. 계절을 거슬러 먼저 도착한 과일이다. 딸기가 겨울에 익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이상하게 여겼다. 봄 과일처럼 부르면서 겨울에 먹는다. 이 어긋남은 농부들의 몇십 년 실험이 남긴 자국이다. 하우스 안에서 기온을 낮추고 조명을 조절하며, 딸기가 꽃 피울 시점을 사람이 다시 설계했다. 한때…


  • 섬이 건네는 작은 해

    겨울이 깊어갈수록 나는 식탁 위에 작은 해 하나를 올려 둔다. 제주의 귤이다. 한 알을 집어 들면 손바닥이 먼저 말을 건다. 얇고 탄탄한 껍질, 약간의 굴곡, 찬 공기에 닿았던 서늘함. 겨울 햇빛이 바람을 맞으며 익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를, 귤은 제 안에 저장하고 있다. 제주의 귤밭은 고요하지 않다. 바람이 먼저 오고, 그다음이 사람이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기가 남해로…


  • 한 그릇의 윤리 — 가격·산지·신뢰

    한 그릇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우리는 세 번 정직해야 한다. 식탁에 한 그릇이 닿기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길다. 한 알이 자라는 시간, 그 알을 골라내는 손, 그 손이 가격을 매기는 자리, 그 가격이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의 동선. 그 동선의 어느 자리에서든 정직하지 못하면, 한 그릇은 결국 식탁에 닿지 못한다. 쿡톡이 운영을 시작하며 결정한 세 가지 약속이 있다. 가격,…


  • 산지에 다녀와서 — 의성의 한 마늘 농가

    한 알의 단단함은 한 사람의 새벽에서 온다. 의성으로 가는 길은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됐다. 차 안은 아직 어두웠고, 라디오에서는 흙냄새 같은 트로트가 한 곡 흘렀다. 운전대를 잡고 가는 동안, 나는 이번에 만날 어른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통화로만 닿아 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조금 두근거린다. 한 가족의 한…


  • 봄을 위로 세우는 자리 — 죽순

    하루에 한 뼘씩 자라는 자리 — 봄은 위로도 자란다. 봄에 흙을 들치고 올라오는 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죽순은 자라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새벽에 한 뼘이던 것이 저녁이면 두 뼘이 되어 있다고들 한다. 한 마디씩 솟아오르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죽순은 봄의 다른 형식이라 부르고 싶다. 다른 봄나물이 흙을 옆으로 펴는 것이라면, 죽순은 봄을 위로 세우는…


  • 음식, 그 너머의 이야기 — 땅이 짓고, 사람이 잇다

    “한 알의 열매 뒤에는, 누군가의 새벽이 있습니다.” 어느 저녁의 기억 어릴 적, 할머니 부엌에서 나던 냄새를 기억하시나요. 장작불 위에 올린 찌그러진 냄비에서 뽀글거리던 된장찌개. 뚜껑을 여는 순간 얼굴로 훅 밀려오던 김. 손가락으로 집어 먹던 뜨거운 밥알. 호박잎 위에 얹은 노릇한 고등어. 그 냄새는 그냥 ‘냄새’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은 계절이었고, 목소리였고, 기억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느 저녁 길을…


  • 흙과 가장 가까운 잎 — 냉이

    냉이는 흙을 등지고 자라지 않는다. 3월 중순쯤 시장 한쪽 좌판에 냉이 한 무더기가 놓이기 시작한다. 흙이 묻은 뿌리가 서로 얽혀 있고, 잎은 작고 들쭉날쭉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흙 한 무더기처럼 보이는데, 손으로 쥐어 보면 그 안에 푸름과 향이 차곡차곡 닫혀 있다. 냉이는 흙을 등지고 자라지 않는다. 흙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봄을 모은다. 어릴 적 어머니의…


  • 흙을 뚫고 올라온 첫 향 — 쑥

    흙을 뚫고 올라온 첫 향, 쑥. 3월의 첫 비가 지나가면 어머니는 자주 마당 한쪽 흙을 들여다보셨다. 거기에 쑥이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다음 날엔 두 마디. 한 일주일이 지나면 광주리 하나가 차올랐다. 어머니는 그것을 캐서 부엌으로 가져오셨고, 그날 저녁이면 부엌에서 쑥 향이 흘러나왔다. 봄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쑥국 한 그릇은 늘 짧게 끓인다.…


  • 겨울 끝의 한 줌 — 시금치

    가장 추운 자리에서 자라는 잎이 가장 다. 겨울이 끝나가는 어느 새벽, 시장에 시금치 한 단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짧고 단단한 잎, 흙이 묻은 뿌리, 굵게 갈라진 줄기. 익숙한 시금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포항초, 또는 남해초라고 부른다. 겨울에만 시장에 나오고, 봄이 오면 사라지는 잎이다. 이 짧은 시기에만 시금치는 자기 본래의 단맛을 입는다. 어릴 적 어머니의…


  • 엄마의 김치냉장고에는 왜 늘 무언가가 더 있을까 — 마음이 보관되는 곳

    엄마의 김치냉장고는 음식 보관소가 아닌, 마음 보관소입니다. 냉장고 한 칸 한 칸에 담긴, 엄마의 언어에 대한 에세이.


  • 붉어지는 법을 배운 겨울

    겨울의 마지막 어귀, 냉장고를 열면 오래된 등불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붉은 딸기 한 팩. 계절을 거슬러 먼저 도착한 과일이다. 딸기가 겨울에 익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이상하게 여겼다. 봄 과일처럼 부르면서 겨울에 먹는다. 이 어긋남은 농부들의 몇십 년 실험이 남긴 자국이다. 하우스 안에서 기온을 낮추고 조명을 조절하며, 딸기가 꽃 피울 시점을 사람이 다시 설계했다. 한때…


  • 섬이 건네는 작은 해

    겨울이 깊어갈수록 나는 식탁 위에 작은 해 하나를 올려 둔다. 제주의 귤이다. 한 알을 집어 들면 손바닥이 먼저 말을 건다. 얇고 탄탄한 껍질, 약간의 굴곡, 찬 공기에 닿았던 서늘함. 겨울 햇빛이 바람을 맞으며 익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를, 귤은 제 안에 저장하고 있다. 제주의 귤밭은 고요하지 않다. 바람이 먼저 오고, 그다음이 사람이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기가 남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