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고 가. 있는 거 다 먹고 가야 해.”
새벽 두 시, 그 냉장고
자취를 시작한 뒤,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새벽 두 시. 잠이 오지 않아 물 한 잔 마시러 부엌에 나가면, 어김없이 엄마의 김치냉장고 앞에 서게 돼요.
그 문을 엽니다. 환한 불빛 아래 — 김치통, 밑반찬 통, 장아찌 병, 얼린 떡, 얼린 된장, 간장게장, 누구 집 할머니가 주셨다는 정체 모를 죽 한 통….
분명히 어제 다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늘 무언가가 더 있을까요.
엄마의 냉장고가 가득 찬 진짜 이유
오랫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왜 이렇게까지 쟁여 두실까.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엄마의 냉장고는 음식 보관소가 아니라, 마음 보관소라는 것을.
거기에는 —
- 어제 이웃이 준 반찬 “아까워서 못 버려서”
- 김장할 때 담근 동치미 “네가 내려오면 먹이려고”
- 얼린 떡국 떡 “설에 올 때 끓여 주려고”
- 장 담그고 남은 된장 “추운 날 찌개 끓여 주려고”
냉장고 한 칸 한 칸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저입니다.
왜 엄마의 세대는 이렇게 쟁여 둘까
엄마의 엄마는, 그러니까 할머니는 김장 독을 땅에 묻던 세대였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한겨울 동안 가족을 먹이려면 한 번에 100포기, 200포기를 담가 묻어야 했어요. 겨울은 길었고, 시장은 멀었고, 가게에 “반찬 사러 간다”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음식을 저장한다는 것은 곧, 가족이 굶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엄마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 감각은 몸에 새겨진 것 같아요 — 아무리 냉장고가 커져도, 마트가 24시간 열려 있어도, 배달 앱이 있어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올 때 없으면 어떡해.”
“있는 게 낫지, 없는 것보다.”
이 말들이 엄마의 냉장고를 늘 가득 채웁니다.
“뭐 좀 가져가” — 엄마의 언어
본가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면, 엄마는 꼭 부엌으로 쪼르르 가십니다.
“잠깐만, 잠깐만. 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도. 아, 이거 무거우면 말하고.”
지퍼백, 밀폐용기, 냉동 비닐봉지. 어느새 양 손에 들지 못할 만큼이 꾸려져 있어요.
서울 올라와 캐리어를 열면,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지 김치와 반찬이 아닙니다.
“네가 혼자 있는 밤에, 내가 옆에 있어 줄 수 없으니까 — 대신 이거라도.”
엄마는 그 말을 직접 하지 않으세요. 대신, 밀폐용기 뚜껑 위에 매직으로 ‘김치찌개용’, ‘콩자반’, ‘멸치볶음’이라고 써 주실 뿐입니다.
김치냉장고라는 이름의 마음
한국 가정에 김치냉장고가 등장한 건 1995년입니다. 30년이 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가전제품은 한국에서 거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기술적인 이유만은 아닙니다.
김치냉장고는 한국인의 기억을 이어 주는 장치예요.
할머니가 묻던 김장 독, 엄마의 김치냉장고, 나의 1인 가구용 미니 김치냉장고.
크기는 작아졌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크기는 여전합니다.
엄마가 없는 집의 냉장고는
언젠가, 우리가 엄마의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냉장고를 열게 될 날이 옵니다.
그 냉장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배달 앱의 음식 포장재, 마트에서 사온 깔끔한 용기, 반쯤 먹다 만 음료수.
엄마의 냉장고처럼 “정체 모를 무언가가 한 통 더” 있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상하게도, 그런 날이 오면 그제야 알게 됩니다.
엄마의 냉장고가 늘 가득 차 있던 이유는, 그 집에 당신이 올 거라는 기대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당신도 누군가의 냉장고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
지금 당신의 냉장고는 어떤가요.
비어 있어도 괜찮아요. 엄마처럼 가득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에게 밀폐용기를 쥐여 주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 밀폐용기 안에 담기는 것은 김치와 반찬이 아니라, 결국 — 마음이라는 것.
오늘 저녁, 본가에 전화 한 통 드려 보세요.
“엄마, 지금 김치냉장고에 뭐 있어?”라는 질문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질문은 김치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 나 엄마 생각하고 있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니까요.
— 어느 자취생의 새벽 두 시 메모.
— 쿡톡(cookTalk) 드림
쿡톡은 엄마의 손맛을 이어 가는 농산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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