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흙 사이로 죽순이 불쑥 올라오던 봄. 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채소.
어릴 적 살던 집 뒤에는 낮은 산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크지도 높지도 않은 산이었는데, 그 산에는 대숲이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비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젖은 흙 사이로 죽순들이 불쑥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죽순이 귀한 식재료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사이 키가 달라지는 게 신기해서, 막 올라온 죽순을 베어 보며 놀곤 했습니다.
새벽에 보던 것이 저녁이면 또 한 마디를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죽순은 자란다기보다, 솟아오른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마음에도 죽순은 봄이 위로 자라는 모양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봄나물은 대개 땅 가까이 퍼집니다. 냉이는 옆으로 숨고, 쑥은 낮게 번집니다.
그런데 죽순만은 다릅니다. 흙을 밀어 올리며 곧게 위로 자랍니다. 짧은 며칠 사이 제 몸을 한 마디씩 세워 올립니다.
봄이 아주 잠깐 욕심을 낼 때, 죽순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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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서야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함부로 베어 놀던 죽순이 사실은 손이 많이 가는 귀한 봄 식재료였다는 것을.
읍내에 사시던 친구 어머니 한 분은, 죽순철이면 늘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새벽에 캔 죽순을 광주리에 담아 내려와 마당 한쪽에 오래 펼쳐 두셨습니다.
죽순은 바로 먹지 못합니다. 껍질을 여러 겹 벗겨 내고, 삶고, 쌀뜨물에 담가 떫은맛을 빼야 합니다.
친구 어머니는 작은 칼 하나를 들고 한참 동안 죽순을 다듬으셨습니다. 부엌 옆에는 벗겨 낸 껍질이 산처럼 쌓였고, 쌀뜨물 안에는 희고 단단한 속살만 남았습니다.
죽순은 채소라기보다, 봄을 오래 손질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죽순회를 잘하셨습니다. 얇게 저민 죽순 몇 점과 초고추장 한 종지.
입에 넣으면 먼저 단단한 결이 닿고, 뒤이어 아주 희미한 단맛이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젖은 흙 같은 향이 천천히 남았습니다.
어릴 때는 그 냄새가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흙냄새야말로 죽순의 본래 자리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산비탈 젖은 흙과, 비 온 뒤의 바람과, 대숲 아래의 어두운 냄새. 죽순은 그 계절을 통째로 품고 올라오는 채소였습니다.
죽순들깨국도 봄이면 자주 올라왔습니다. 들깨를 풀어 넣은 국물 사이로 얇은 죽순 조각들이 떠다니던 국.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몸 안으로 봄이 한 번 지나간 듯했습니다.
따뜻했지만 무겁지 않았고, 연했지만 어딘가 단단한 맛이 남았습니다. 그 국 냄새를 떠올리면 지금도 비 온 뒤의 대숲이 먼저 생각납니다.
죽순은 오래 죽순으로 머물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자라면 그것은 이미 대나무가 됩니다.
우리 식탁에 오는 것은, 흙을 뚫고 올라온 아주 짧은 시간뿐입니다.
그래서 죽순은 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채소처럼 느껴집니다. 짧게 솟아오르고, 짧게 머물고, 곧 다른 것이 되어 버리는 것. 봄도 늘 그렇게 지나갑니다.
오늘 시장에서 짧은 죽순 한 묶음을 보았습니다. 누군가 새벽 대숲에서 캐어, 반나절 만에 시장까지 데려온 봄.
그 한 묶음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래전 뒷산이 떠올랐습니다. 비 온 뒤의 흙냄새와, 대숲 아래 솟아오르던 죽순과,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을 베어 놀던 어린 날의 손.
봄은 늘 그렇게, 모르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중에야 자기 이름을 알려 줍니다.
2026.05.08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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