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재료를 한 솥에 볶으면 섞이지만, 느르미는 섞지 않는다. 도라지·고기·버섯·박오가리를 각각 익혀 한 접시에 모아 저마다의 빛과 맛을 살린다 — 화양적과 한 계열의, 섞지 않은 어우러짐.
한 접시 위에 빛깔이 나란하다. 도라지의 흰빛, 소고기의 갈빛, 느타리의 검은빛, 박오가리의 누런빛이 가지런히 놓이고, 그 위에 붉은 실고추와 노란 지단이 흩뿌려져 있다. 한데 뒤섞인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빛으로 모여 있는 한 접시다.
우리는 여러 재료를 한 솥에 넣고 볶으면 어우러진다고 여긴다. 그런데 느르미는 섞지 않는다. 제각각 익혀, 나란히 모은다.
『시의전서』의 느르미는 이렇게 짓는다. 도라지와 소고기(황육), 파, 박오가리, 느타리, 석이를 각각 알맞게 손질해 데치고 양념하여 볶는다. 한 가지씩 따로 다룬 뒤 한데 모아 모양 있게 담고, 간은 짜고 싱거움을 보아 가며 기름·소금·후추로 맞춘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실고추·석이·지단을 곱게 채 쳐 흩어 얹는다. 여러 가지를 한 접시에 모으되, 어느 하나도 제 빛과 맛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까닭은 분명하다. 한 솥에 다 넣고 볶으면 색이 뭉개지고 맛이 한 가지로 섞여 버린다. 따로 익혀 나란히 두면, 도라지는 도라지대로 아삭하고 고기는 고기대로 깊고 버섯은 버섯대로 향을 지킨 채, 한 접시 위에서 비로소 어우러진다. 섞지 않는 것이 더 잘 어우러지는 법 — 느르미는 그 역설을 한 접시에 담은 음식이다. 같은 솜씨를 꼬치에 색 맞춰 꿰어 지지면 화양적(華陽炙)이 되니, 둘은 한 계열의 음식이다.
느르미는 섞지 않는다. 제각각 익혀 나란히 둘 때, 한 접시가 비로소 어우러진다.
오늘의 부엌으로 옮기면 이렇다. 도라지는 소금에 주물러 데쳐 쓴맛을 빼고, 소고기는 가늘게 썰어 양념하고, 느타리와 박오가리(불려 둔 것)·파는 알맞게 자른다. 각각을 간장·기름·후추로 양념해 따로 볶거나 지진다. 한 접시에 색을 맞춰 가지런히 담고, 실고추·석이·지단 채를 위에 얹는다. 꼬치에 색 순서대로 꿰어 밀가루·달걀옷을 입혀 지지면 화양적이 된다.
어우러짐이 늘 뒤섞임은 아니다. 때로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한자리가 가장 고와진다. 도라지의 흰빛이 고기의 갈빛 곁에 또렷이 놓이고, 그 사이로 붉은 실고추가 지나갈 때, 한 접시는 어느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빛을 얻는다. 잔칫상 위 알록달록한 한 접시는, 섞지 않은 솜씨가 차린 어우러짐이다.
낱말 풀이 〈이 글의 옛말〉
- 느르미 — 여러 재료를 각각 익혀 한 접시에 모아 담은 음식. 누름적과 같은 계열.
- 화양적(華陽炙) — 같은 재료를 꼬치에 색 맞춰 꿰어 지진 적(炙). 느르미와 한 계열의 잔치 음식.
- 황육(黃肉) — 소고기.
- 박오가리 — 박을 켜로 떠 말린 것. 불려서 나물·느르미에 쓴다. 박고지.
- 석이(石耳) — 바위에 붙어 자라는 버섯. 곱게 채 쳐 검은 고명으로 쓴다.
이 글은 『시의전서』(是議全書, 19세기 · 저작권 소멸) 원문을 쿡톡이 한 글자씩 직접 판독·전사한 것에 근거한다. 일부 드문 옛 글자는 짐작 없이 〔?〕로 두었다.
◆ 제철 한 줄 — 느르미는 도라지와 제철 채소·버섯을 각각 익혀 한 접시에 모은 음식이다. 산지의 도라지로 흰빛 한 자리를 더해, 색 고운 한 접시를 차려 보시길.
이 연재는 전자책 『시의전서, 다시 차리다』(전 6권)로 엮이고 있습니다. → 미리보기 무료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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