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수라 — 임금의 밥은 붉었다

7월의 매대에서 팥을 찾으면 ‘빙수 재료’ 칸으로 안내받습니다. 통단팥·팥앙금 — 여름의 팥은 이제 디저트의 말이 됐습니다. 그런데 궁중의 아침 밥상에는 날마다 붉은 팥밥이 올랐습니다. 달지 않은 팥, 밥이었던 팥의 이야기.

팥수라 — 임금의 밥은 붉었다

두 그릇의 밥

임금의 진지를 수라(水剌)라 불렀습니다. 아침저녁 수라상에는 밥이 두 그릇 올랐는데, 원반에는 흰수라, 곁반에는 팥수라 — 임금은 그날의 입맛대로 흰 밥과 붉은 밥 가운데 하나를 골랐습니다. 반찬을 고르는 게 아니라 밥 자체를 고르는 것, 그것이 수라상의 사치였습니다.

팥 없는 팥밥

옛 조리 기록이 전하는 팥수라는 뜻밖에도 팥알이 없는 밥입니다. “붉은 팥 삶은 물로만 지은 밥” — 쌀과 팥을 한데 안치는 게 아니라, 팥을 삶아 그 붉은 물만 밥물로 씁니다. 그래서 밥은 알갱이 하나 없이 은은하게 붉고, 붉다 하여 홍반(紅飯)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잡곡을 섞는 밥이 아니라 물을 들이는 밥. 오늘 우리가 아는 팥밥과는 결이 다른, 색을 먹는 밥이었던 셈입니다.

붉은색이 하는 일

왜 굳이 붉은 밥이었을까요. 붉은 팥이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믿음은 동짓날 팥죽에서 이미 익숙합니다. 문지방에 뿌리던 그 팥물이 임금의 밥그릇에서는 매일의 색이 됐습니다. 몸을 지키는 뜻과 눈을 즐겁게 하는 뜻이 한 그릇에 담긴 것이지요. 흰 밥 옆에 붉은 밥 — 조선의 밥상은 색으로도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부엌

팥 한 줌을 씻어 물을 넉넉히 붓고 이십 분쯤 삶습니다. 알은 건져 두고, 붉은 팥물만 식혀 밥물 삼아 밥을 짓습니다. 은은한 분홍빛 밥이 됩니다 — 이것이 궁중의 방식. 건져 둔 팥알은 설탕에 조려 두면 여름 빙수 위에 얹을 단팥이 되니, 한 냄비로 임금의 밥과 오늘의 디저트가 다 나오는 셈입니다.

낱말 풀이

  • 수라(水剌) — 임금의 진지를 높여 부르던 말. 고려 말 몽골에서 온 말이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 홍반(紅飯) — 팥 삶은 물로 지어 붉은빛이 도는 밥. 팥수라의 다른 이름.
  • 원반·곁반 — 수라상의 큰 상과 곁들이 상. 흰수라는 원반에, 팥수라는 곁반에 올랐다.
  • 적두(赤豆) — 붉은 팥. 오늘 매대에서는 국산 적두라는 이름으로 만난다.

팥수라 조리법(“붉은 팥 삶은 물로만 지은 밥”)은 전통식품 조사표 기록에 따르며, 수라상의 흰수라·팥수라 구성은 궁중 음식 문헌 서술을 참고했습니다. 수라의 몽골어 기원은 여러 설 가운데 하나로 적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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