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월 7일이나 8일에 드는 절기. 낮 기온은 삼십 도를 넘는데 달력은 오늘부터 가을이라 적는다. 논은 김매기를 끝내고 한가해지지만, 밭에서는 넉 달 뒤 김장이 될 무와 배추를 심는다. 벼는 이제 여물기 시작해 햅쌀까지 두 달, 뒤주에 남은 것은 지난가을 쌀이다. 가을은 이름부터 온다 — 이름이 먼저 오는 데는 쓸모가 있다.
새벽에 택배 상자를 트럭에 싣는데 손잡이가 벌써 뜨겁다. 매미는 어제와 같다. 낮 기온은 삼십 도를 훌쩍 넘길 참이다. 그런데 달력은 오늘부터 가을이라고 적어 두었다.
해마다 8월 7일이나 8일에 드는 절기, 입추(立秋)다. 올해는 8월 7일 저녁 8시 43분에 든다. 24절기의 열셋째, 가을이 선다는 이름의 마디.
절기는 기온이 아니라 태양의 자리를 기준으로 나눈다. 황경이 135도에 이르는 때가 입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입추를 대서와 처서 사이, 음력 7월에 드는 절기로 적었다. 그러니 입추가 지나도 더위가 이어지는 것은 어긋난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일이다. 설 립(立)에 가을 추(秋). 입춘·입하·입동과 같은 짜임이다. 네 계절의 문 앞에 똑같이 설 립을 세워 두었다. 든다고 하지 않고 선다고 했다. 계절이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와서 선다는 말처럼 읽힌다. 서 있는 동안 방 안 공기는 한참 그대로다. 올해는 입추가 지난 뒤에 말복이 온다. 8월 14일. 가을이 문 앞에 선 다음에 한 해의 마지막 복날이 오는 셈이다.
입추의 논은 조용하다. 김매기가 끝나 손이 비고, 벼는 이삭을 패고 여물기 시작한다. 백과사전은 이 무렵의 한가로움을 두고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이 거의 전국적으로 전해진다고 적었다. 같은 사전이 5월을 두고 옮겨 둔 말은 “발등에 오줌 싼다”였다. 같은 농사에 두 개의 속도가 있다. 그런데 밭은 다르다. 이때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는다. 9월, 10월에 서리가 내리고 얼기 전에 거두어 겨울 김장에 대비한다고 사전은 적었다. 가장 더운 철에 가장 추운 철에 먹을 것을 심는 셈이다. 밤도 조금 달라진다. 입추가 칠월칠석 무렵에 들기 때문에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가을 채비를 해야 한다고 사전은 적었다. 낮의 기온으로는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해가 지고 난 뒤의 공기는 확실히 다른 계절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래서 입추의 부엌은 오늘 먹을 것보다 넉 달 뒤에 먹을 것과 이어져 있다. 지금 씨를 넣은 무와 배추가 김치냉장고로 들어간다. 독이 하던 일을 요즘은 냉장고가 하지만, 넉 달이라는 거리는 그대로다. 부엌의 겨울은 부엌이 아니라 밭에서 시작된다.
쌀은 반대다. 벼는 이제 겨우 여물기 시작했으니 햅쌀까지는 두 달 가까이 남았다. 쌀통에 있는 것은 지난가을에 거둔 쌀이다. 한 해 중 쌀이 가장 오래된 때가 지금이다. 오래된 쌀은 더위에 약하다. 눅눅한 자리에 두면 냄새가 앉고 밥을 지어도 찰기가 덜하다. 옛 부엌이 쌀독을 서늘하고 바람 통하는 자리에 두려 애쓴 까닭이다. 씻을 때 물이 유난히 뿌옇게 나온다면 그만큼 묵었다는 뜻이니, 물을 조금 넉넉히 잡고 불리는 시간을 늘린다. 이 계절의 밥은 그러니까 기다리는 밥이다. 새 쌀은 아직 논에 있고 새 김치는 아직 씨앗이다. 지금 상에 오르는 것은 지난 계절이 남겨 둔 것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입추가 지나 비가 닷새 넘게 이어지면 조정이나 고을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고 전한다. 비를 멎게 해달라는 제사다. 곡식이 여무는 철이라 지나친 비는 벼를 상하게 했다. 날씨로 그해를 점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입추에 하늘이 맑으면 온갖 곡식이 풍년이고, 비가 조금 내리면 길하되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그 자체로 농사의 한 대목이었던 셈이다.
가을은 이름부터 온다. 이름이 먼저 오고 계절이 뒤따른다. 그 사이의 보름 남짓이 입추다. 이름이 먼저 오는 데는 쓸모가 있다.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동안 무와 배추를 심을 수 있다. 정말로 서늘해진 뒤에 심으면 이미 늦다. 계절의 이름은 알림이 아니라 신호에 가깝다.
다음 절기는 처서(處暑), 올해는 8월 23일이다. 더위가 머무르다 물러선다는 뜻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풀에 이슬이 앉기 시작한다.
뜨거운 손잡이를 잡고 가을이라 적힌 달력을 본다. 둘 다 맞다. 그 사이가 입추다.
참고: 절기 시각은 한국천문연구원 24절기 입기 시각 자료, 농사·속담·가을 채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입추 항목, 『사시찬요』 인용). 기청제와 날씨점은 조선시대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을 옮겼습니다. 절기 날짜는 해마다 하루 이틀 움직입니다.
이 계절, 더 깊이
- 대서(大暑) — 더위가 가장 깊은 날, 가을이 가장 가까운 날
- 처서(處暑) — 더위가 그치는 즈음
- 몇 수입니까 — 포도 한 상자를 읽는 법
- 24절기 — 한 해의 마디마디 — 시리즈 길잡이
2026.08.07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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