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은 포도를 빛깔로 먼저 나눴습니다. 자줏빛은 말젖, 흰빛은 수정. 씨 없는 것도 있다는 한 줄, 북쪽 과일 중 가장 귀하다는 판정, 그리고 즙을 내어 술을 빚는다는 마지막 줄 — 1540년 『수운잡방』의 쌀 넣은 포도주까지. 「동의보감 식탁」 포도 편.
「동의보감 식탁」 — 사백 년 전 의서의 탕액편을 부엌의 언어로 읽습니다. 오이, 복숭아에 이어 이번에는 9월의 과일, 포도입니다.
한 송이를 들면 알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손끝에 뽀얀 가루가 묻는다. 씻기 전의 포도는 그 가루 때문에 조금 흐리게 보이는데, 물에 담그면 검붉은 빛이 그제야 드러난다. 사백 년 전 사람이 본 포도도 그 색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그 옆에 다른 빛깔의 포도 하나를 더 적어 두었다.
원문 그대로 — 포도(蒲萄)
蒲萄 보도
性平, 味甘(一云甘酸), 無毒. 主濕痺, 治淋, 通小便, 益氣强志, 令人肥健.
○子有紫白二色. 紫者名馬乳, 白者名水晶. 又有圓者, 又有無核者. 七月八月熟. 北果之最珍者.
○多食, 昏人眼.
○取汁釀酒, 名曰蒲萄酒. 《本草》
옮기면 이렇습니다. “성질이 평하고 맛은 달며(달고 시다고도 한다) 독이 없다. 습으로 저린 데를 다스리고, 소변을 잘 나가게 하며, 기운을 돕고 뜻을 굳세게 하며, 사람을 살찌고 튼튼하게 한다. 알에는 자줏빛과 흰빛 두 가지가 있다. 자줏빛은 마유(馬乳)라 하고 흰빛은 수정(水晶)이라 한다. 둥근 것도 있고 씨 없는 것도 있다. 칠월 팔월에 익는다. 북쪽 과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다. 많이 먹으면 눈이 어두워진다. 즙을 내어 술을 빚으니 포도주라 한다.”(쿡톡 옮김)
말젖과 수정
표제 옆의 언해 이름은 ‘보도’입니다. 포도를 그렇게 읽던 때의 표기입니다. 본문이 먼저 나눈 것은 맛이 아니라 빛깔입니다. 자줏빛 포도에는 말젖이라는 이름을, 흰 포도에는 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유는 알이 길쭉한 모양에서, 수정은 껍질이 비쳐 보이는 데서 온 이름이겠지요. 그리고 한 줄 더 — 씨 없는 것도 있다. 씨 없는 포도가 최근의 품종 개량이 아니라 사백 년 전 책에 이미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이 항목의 뜻밖입니다.
흰 포도의 이름 수정은 이 블로그의 다른 글과 이어집니다. 1398년 가을, 병든 태조가 찾은 것이 바로 수정포도(水精葡萄)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실록 편에 따로 적었습니다. 실록은 정(精), 의서는 정(晶)으로 글자가 다르지만 소리가 같은 이름이고, 의서에서는 흰 포도의 통칭으로 나옵니다. 임금이 찾은 것은 특별한 품종이라기보다 흰빛 포도 한 송이였다고 읽어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북쪽 과일
“북과지최진자(北果之最珍者)” — 북쪽 과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말은 『동의보감』이 자주 인용하는 중국 본초서의 시선입니다. 포도가 서역에서 중원으로 건너온 과일이라, 남쪽의 귤이나 감과 달리 북쪽 것으로 분류됐습니다. 우리 땅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고려 말 문인들의 시에 포도주가 나오지만, 흔한 술은 아니었다고 전합니다. 귀한 것이었기에 임금의 병상까지 올라갔습니다.
칭찬 뒤에 붙는 단서는 이 시리즈의 익숙한 문체입니다. 많이 먹으면 눈이 어두워진다. 오이는 차니 지나치지 말라 했고, 복숭아는 뜨거우니 열이 난다 했고, 포도는 눈을 든 셈입니다. 근거를 따지는 일은 옛 의학의 몫으로 두겠습니다. 부엌이 눈여겨볼 것은 그 다음 줄입니다.
즙을 내어 술을 빚으니
취즙양주(取汁釀酒), 즙을 내어 술을 빚는다. 『동의보감』은 한 줄로 끝냈지만, 그보다 칠십여 년 앞선 책이 방법을 적어 두었습니다. 1540년 무렵 안동의 김유가 엮은 『수운잡방』입니다. 여기 실린 포도주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백미로 죽을 쑤어 누룩과 함께 밑술을 빚고 다시 찐 쌀에 누룩과 포도 가루를 섞어 덧술하는 법, 다른 하나는 포도를 짓이겨 찹쌀죽과 누룩가루를 섞어 항아리에 담는 법입니다.
둘 다 쌀이 들어갑니다. 포도만으로 발효시키는 서양의 포도주와 다른 자리입니다. 우리 포도는 당이 낮아 술이 되기에 모자랐고, 그 모자람을 쌀이 채웠습니다. 쌀술을 빚던 손이 포도를 만난 방식이었습니다. 포도주라는 이름은 같아도, 항아리 안에서 벌어진 일은 달랐습니다.
산포도, 머루
蘡薁 묀멀위
卽山蒲萄也. 實細而味酸, 亦堪作酒. 《丹心》
포도 항목의 끝에는 산포도가 붙어 있습니다. 언해 이름은 ‘묀멀위’, 오늘의 머루입니다. 알이 잘고 맛이 시지만 역시 술을 빚을 만하다고 적었습니다. 재배 포도가 귀하던 시절, 산에서 따는 머루가 더 가까운 포도였을 것입니다. 실록의 태조가 처음 받은 것도 서리 맞은 산포도 한 상자였습니다.
오늘의 부엌
칠월 팔월에 익는다고 적힌 것은 음력이니, 오늘의 달력으로는 8월 말에서 9월입니다. 상주 모동의 캠벨이 검붉어지는 때와 맞습니다. 사백 년 전의 두 빛깔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검붉은 캠벨과 거봉이 마유의 자리에, 청포도와 샤인머스켓이 수정의 자리에 앉습니다. 씨 없는 것도 있다던 한 줄은 이제 품종 이름이 되었습니다. 술을 빚는 대신 우리는 알을 떼어 얼리고, 끓여 짜고, 설탕에 담급니다. 방법은 「남은 포도 — 얼리고, 짜고, 담그는 세 가지 길」에 따로 적었습니다.
책은 포도를 북쪽의 귀한 과일이라 적었다. 지금은 9월이면 상자째 온다. 귀함이 사라진 자리에 흔함이 앉았고, 그 흔함을 만든 것은 밭의 사백 년이다.
낱말 풀이
- 보도 — 『동의보감』 언해가 적은 포도의 옛 표기.
- 마유(馬乳) — 말젖. 자줏빛 포도의 옛 이름. 알이 길쭉한 모양에서 온 것으로 본다.
- 수정(水晶) — 흰 포도의 옛 이름. 실록의 수정포도(水精葡萄)와 글자는 다르고 소리는 같다.
- 영욱(蘡薁) — 산포도. 언해는 ‘묀멀위’라 적었다. 오늘의 머루.
- 취즙양주(取汁釀酒) — 즙을 내어 술을 빚다. 포도주의 정의.
이 글은 『동의보감』(1613, 저작권 소멸) 탕액편 권2 과부의 기록을 소개하는 인문 콘텐츠입니다. 옛 문헌의 서술이며 오늘의 의학·영양 정보가 아닙니다. 원문은 위키문헌의 탕액편 전사본을 대조했고, 번역은 쿡톡이 새로 했습니다. 『수운잡방』 포도주 두 가지는 전통식품 DB의 주류 항목과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의 소개 글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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