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건네는 작은 해

겨울이 깊어갈수록 나는 식탁 위에 작은 해 하나를 올려 둔다. 제주의 귤이다.

한 알을 집어 들면 손바닥이 먼저 말을 건다. 얇고 탄탄한 껍질, 약간의 굴곡, 찬 공기에 닿았던 서늘함. 겨울 햇빛이 바람을 맞으며 익은 것이 어떻게 단단해지는지를, 귤은 제 안에 저장하고 있다.

제주의 귤밭은 고요하지 않다. 바람이 먼저 오고, 그다음이 사람이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기가 남해로 흘러가는 길목에 과수원이 자리를 잡는다. 비를 덜 맞아야 당도가 올라가는 품종은 비가림 하우스로 옮겨졌고, 가장 단단한 껍질을 원하는 사람들은 타이벡이라는 흰 부직포를 바닥에 깔아 햇빛을 두 번 쐬게 했다. 위에서 한 번, 반사된 빛으로 한 번. 귤은 두 번의 햇빛을 제 몸에 적는다.

과수원에 들어서면 바람이 먼저 길을 낸다. 돌담 위로 솟은 가지들이 일정하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고, 잎은 한라산 쪽으로 등을 보인다. 바람을 등진 가지가 가장 굵은 열매를 단다는 것은, 농부들이 오래 걸어 다닌 끝에 발견한 사실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의 자세에 적힌다.

겨울이면 식탁 가운데에 종이박스 하나가 놓이던 저녁이 있었다. 누군가의 집에서 보내온 귤이었고, 뚜껑을 여는 손은 늘 어머니였다. 한 알을 꺼내 내 앞에 놓아 주시던 그 장면을, 나는 오래도록 겨울의 첫 장면으로 기억한다. 텔레비전 불빛 앞에서 귤을 까던 손, 껍질을 난로 위에 얹어 두던 습관, 손끝에 옮아붙은 향이 잠들기 전까지 따라오던 냄새. 귤은 맛보다 먼저 장면을 남기는 과일이었다.

그 향은 늘 늦게까지 따라왔다. 손등에서 머물다 베갯잇으로 옮겨가, 잠을 시작하는 자리에 가만히 남았다. 어떤 겨울의 잠은 귤 향이 깔린 잠이었다.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 작은 해의 단맛이라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귤을 까는 방식으로 사람을 본다. 꼭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한 번에 열어 내는 사람, 손톱을 조심히 넣어 껍질을 일으키는 사람, 칼로 열십자를 긋고 네 조각을 떼어내는 사람. 각자의 방식이 있고, 각자의 성급함과 정성이 있다. 어떤 방식이든 한 알을 다 까고 나면 손끝에 향이 오래 남는다. 그 향이 귤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조천, 남원, 서귀포, 한경. 제주의 동과 서를 나누는 이 지명들은 귤이 자라는 정확한 언덕의 방향이기도 하다. 바람을 맞는 쪽과 덜 맞는 쪽, 빛이 먼저 닿는 쪽과 늦게 닿는 쪽. 같은 품종도 자리에 따라 다르게 익고, 그것을 구분해 내는 건 결국 한평생 귤나무 사이를 걸어온 사람뿐이다.

지금은 감귤이 지고 한라봉과 천혜향이 자리를 물려받는 시기다. 4월의 귤은 일찍 수확된 것들의 기록이다. 늦봄까지 식탁에 오르는 귤 한 알은, 어느 농부가 12월의 새벽에 따서 어두운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열매다. 시간을 건너온 단맛은 조금 더 깊어진다.

12월의 첫 추위가 내려오면 농부의 새벽이 일찍 시작된다. 이슬 묻은 잎 사이로 손가위가 들어가고, 짧은 소리가 한 알씩 떨어진다. 흰 입김 너머로 손등은 차고, 손바닥에 잡히는 귤의 무게는 늘 비슷하게 정확하다. 그 정확함이 한 해의 단맛을 모은다.

오늘 한 알을 까며 생각한다. 해 하나를 집에 들여놓는다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작고 둥글고 따뜻한, 이 섬에서 건너온 겨울의 답.

— 쿡톡의 편지, 섬이 보내온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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