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도착한 작은 박스. 손에 쥐고 두어 번 굴려 잡숴 보세요. 농장 사장님이 박스 안 종이에 적어 두신 한 문장.
겨울이 깊어질수록 식탁 위에는 작은 해 하나가 올라옵니다. 감귤입니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작은 박스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농산물 일을 하며 알게 된 농장 사장님이 보내 주신 귤이었습니다.
박스를 열기 전 손을 잠시 위에 얹어 봅니다. 종이 틈 사이로 희미한 향이 먼저 새어 나옵니다.
차갑고도 살아 있는 냄새. 멀리서 막 도착한 것들만이 가진 짧은 숨결 같은 향.
귤 한 알을 손안에 올려 둡니다. 작고 둥근 몸 안에서 알맹이들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손바닥의 온도가 닿자, 껍질 속 향이 조금씩 풀려 나옵니다.
귤은 신기하게도 손안에서 잠시 굴려 주면 맛이 달라지는 과일입니다. 막 딴 귤일수록 그렇습니다.
차갑던 신맛은 조금 가라앉고, 단맛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옵니다.
옛 어른들은 잘 익지 않은 귤을 두 손 사이에 넣고 가만히 비비기도 하셨습니다. 손맛이라는 말은 꼭 음식에만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알의 과일도 사람 손의 온도를 지나며 제 맛을 조금씩 열어 보이니까요.
제주도의 귤밭에는 늘 바람이 먼저 도착합니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공기가 과수원 사이를 오래 지나갑니다.
돌담 곁 나무들은 한쪽으로 조금씩 몸을 기울이고 있고, 잎들은 바람의 방향을 기억한 채 자랍니다.
바람을 견딘 가지가 더 단단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바람은 나무의 자세 속에 남아 있습니다.
요즘 귤 농사는 햇빛까지 계산하며 짓습니다. 비를 너무 맞으면 당도가 떨어지는 품종은 비가림 아래로 옮기고, 더 깊은 단맛을 원하는 밭에는 흰 부직포를 깔아 빛을 한 번 더 반사시킵니다.
귤은 두 번의 햇빛을 자기 몸 안에 저장합니다. 위에서 한 번, 땅에서 다시 한 번.
그래서 겨울 귤을 까 보면, 껍질 안에 햇빛이 오래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12월의 과수원은 새벽이 아주 일찍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딴 귤은 껍질이 무르기 쉬워, 볕이 오르길 기다렸다가 수확합니다.
잎 끝에 맺힌 물기가 천천히 사라지는 시간. 그 짧은 기다림 뒤에야, 귤 안의 단맛이 가장 또렷해진다고.
귤을 보내 주신 사장님도 박스 안 종이에 짧게 적어 두셨습니다.
“손에 쥐고 두어 번 굴려 잡숴 보세요.”
그 문장을 읽는데 귤보다 먼저 사람의 손이 떠올랐습니다.
새벽 과수원에서 차가운 귤을 하나씩 따내던 손. 그 손이 지나온 뒤에야, 이 겨울의 단맛도 우리 식탁까지 오는 것이겠지요.
조천, 남원, 서귀포, 한경. 제주의 지명들은 사실 귤이 익는 방향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먼저 닿는 언덕과, 햇빛이 늦게 드는 밭과, 습기가 오래 남는 골짜기.
같은 귤도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아내는 사람은 평생 귤나무 사이를 걸어온 농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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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귤 까는 모습으로 사람을 봅니다.
엄지손가락으로 꼭지를 눌러 한 번에 벗겨 내는 사람. 손톱 끝으로 조심스럽게 틈을 여는 사람. 칼로 십자를 내고 천천히 네 조각으로 나누는 사람.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귤 한 알을 다 까고 나면 손끝에는 오래 향이 남습니다. 그 향은 이상하게도 겨울 햇빛의 냄새와 닮아 있습니다.
오늘도 귤 한 알을 천천히 깝니다.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작은 햇빛 하나가 손안에서 열립니다.
해 하나를 집 안으로 들여놓는다는 말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12.18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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