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붉은색도, 고추장의 매운맛도 한반도 토박이가 아니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와 비교적 최근에야 한국 밥상을 붉게 물들인 고추 — 이름의 오해부터 캡사이신, 김치가 붉어진 날까지. 한국의 맛, 고추 편.
고추 — 아메리카에서 건너와 한국 밥상을 붉게 물들인, 토박이가 아닌 매운맛.
가장 한국적인 매운맛은 사실 가장 멀리서 왔다. 김치가 붉어진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붉은 김치, 빨갛게 끓는 찌개, 고춧가루 한 줌. 한국의 밥상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붉은색이 옵니다. 그런데 그 붉은색의 주인공인 고추가, 사실은 한반도의 오랜 토박이가 아닙니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에서 온, 비교적 늦은 손님입니다.
이름의 사연
‘칠리(chili)’라는 말은 아즈텍의 나우아틀어 ‘칠리(chīlli)’에서 그대로 왔습니다. 우리말 ‘고추’의 뿌리는 한자어 ‘고초(苦椒)’ — 쓴 후추라는 뜻입니다. 15세기 문헌에는 ‘고쵸’로 적혔고, ‘ㅗ’가 ‘ㅜ’로 바뀌며 오늘의 ‘고추’가 되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는 ‘남만초(南蠻椒)’, ‘번초(番椒)’, ‘왜겨자’처럼 ‘바깥에서 온 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후추가 아닌데 후추라 불린 이유
재미있는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1492년 아메리카에 닿은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고, 이 매운 열매를 인도의 후추(pepper)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후추를 뜻하는 ‘피미엔타(pimienta)’라 적었습니다. 이 오해가 그대로 굳어, 영어 ‘페퍼(pepper)’, 포르투갈어 ‘피멘타’, 독일어 ‘페퍼(Pfeffer)’ — 고추를 가리키는 서양의 이름 상당수가 사실은 ‘후추’라는 말입니다. 식물로는 후추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고향은 아메리카, 나이는 육천 년
고추(Capsicum)의 고향은 아메리카, 그중에서도 멕시코로 봅니다. 사람이 고추를 길들인 것은 대략 6천 년 전으로 보며, 멕시코 테우아칸 계곡의 동굴 유적에서는 그보다 앞서 야생 고추를 거두어 먹은 흔적도 나왔습니다. 식물학적으로는 가지과에 속해, 토마토·감자와 한집안입니다. 셋 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사촌인 셈입니다.
매운맛의 정체
고추의 매운맛은 사실 ‘맛’이 아닙니다.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캡사이신은 혀의 미각이 아니라, 뜨거움과 아픔을 느끼는 통각 수용체(TRPV1)에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뇌는 그것을 ‘맵다’가 아니라 ‘뜨겁다, 아프다’로 받아들입니다. 매운 것을 먹고 땀이 나고 얼얼한 건 그 때문입니다. 1912년 약리학자 윌버 스코빌은 이 캡사이신의 양으로 매운 정도를 재는 ‘스코빌 척도’를 고안했습니다. 오늘날 고추의 매움을 숫자로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입니다.
바다를 건너 아시아로
아메리카에 갇혀 있던 고추를 세계로 실어 나른 것은 콜럼버스 이후의 배들이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이 16세기에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아프리카로 고추를 빠르게 퍼뜨렸습니다. 지금은 매운맛이 당연한 인도·태국·쓰촨의 음식도, 불과 몇백 년 전에야 이 붉은 열매를 만난 셈입니다.
한국에 닿기까지
한국에는 대체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임진왜란을 전후한 무렵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봅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는 남만초(南蠻椒)에 독이 있으며 왜국에서 처음 들어와 흔히 왜겨자(倭芥子)라 부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정된 정설이라기보다 학설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다른 계통의 고추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론, 들어온 길이 일본만은 아니었으리라는 반론이 함께 나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길로 왔든 고추의 고향이 아메리카라는 사실입니다.
김치가 붉어진 날
고추가 들어오기 전, 김치는 붉지 않았습니다. 소금과 채소로 담근 희고 맑은 김치였습니다. 고추가 김치와 고추장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은 18세기 무렵으로, 생각보다 늦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적’이라 여기는 붉고 매운 밥상은, 길게 잡아도 삼백 년 안팎의 비교적 젊은 풍경인 셈입니다. 한 작물이 한 나라의 입맛을 통째로 바꾼,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의 고추
이제 고추는 한국 음식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고춧가루로 김치를 물들이고, 고추장으로 찌개와 비빔밥의 바탕을 만들고, 청양고추 같은 매운 품종으로 더 깊은 매움을 더합니다. 늦게 온 손님이 어느새 주인의 자리에 앉은 셈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매운맛은, 가장 멀리서 왔습니다.
식탁은 늘 그렇게, 멀리서 온 것을 제 것으로 삼으며 깊어집니다.
근거: 이수광 『지봉유설(芝峯類說)』(1614) 남만초 항목. 고추의 멕시코 기원과 순화 연대는 고고식물학·유전학 연구에, 고추장 기록은 『소문사설(謏聞事說)』·『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따릅니다. 전래 시기와 경로는 학계에서 아직 갈리는 문제라, 단정하지 않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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