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탈리아다운 재료가 사실은 아메리카에서 왔다. 안데스에서 나 멕시코에서 길든 토마토가 유럽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 나우아틀어 어원부터, 널리 퍼진 납 식기 이야기의 진위까지. 미식 사전.
토마토 — 안데스에서 나 멕시코에서 길들고, 유럽에선 한동안 독초로 의심받은 붉은 열매.
가장 이탈리아다운 재료가 사실은 아메리카에서 왔고, 유럽의 북쪽에서는 마음 놓고 먹기까지 두 세기가 걸렸다.
파스타 위의 붉은 소스, 카프레제의 빨강. 토마토를 떠올리면 자연히 지중해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 붉은 열매는 지중해의 토박이가 아니라, 바다 건너 아메리카에서 온 손님입니다. 게다가 유럽이 이 열매를 마음 놓고 먹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부풀어 오르는 열매
‘토마토’라는 말은 아즈텍의 나우아틀어 ‘토마틀(tomatl)’에서 스페인어 ‘토마테(tomate)’를 거쳐 왔습니다. ‘부풀다, 살지다’라는 뜻의 말뿌리에서 왔다고 보는 풀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다만 나우아틀어에서 ‘토마틀’이 먼저 가리킨 것은 지금 우리가 아는 붉은 토마토가 아니라, 꽈리처럼 껍질에 싸인 작고 푸른 토마티요 쪽이었습니다. 크고 붉은 열매는 따로 ‘시토마틀(xitomatl)’이라 불렀는데, ‘배꼽(xictli)이 달린 토마틀’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오늘의 토마토는 이쪽 계보입니다.
우리말로는 ‘일년감’ — 한 해만 사는 감 — 이라 했고, 한자로는 ‘남만시(南蠻枾)’, 땅에 가까이 자란다 하여 ‘땅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안데스에서 멕시코로
토마토의 야생 조상은 남미 안데스,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일대에서 자랐습니다. 그것을 오늘의 작물로 완성한 것은 메소아메리카, 곧 멕시코였고, 스페인 사람들이 닿았을 때 아즈텍은 이미 토마토를 요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의 길은 생각보다 구불구불했던 모양입니다. 2020년의 대규모 유전체 연구는, 에콰도르·페루 일대에서 이미 중간 크기의 열매로 기르던 무리가 있었고, 그것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동안 오히려 길든 성질을 일부 잃었다가 멕시코에서 다시 작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안데스에서 나 멕시코에서 길들었다’는 큰 줄기는 유지되지만, 한 번에 곧게 이어진 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식물학적으로는 가지과에 속해, 고추·감자와 한집안입니다. 셋 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사촌인 셈입니다.
독사과로 불리던 시절
16세기에 유럽으로 건너간 토마토는, 한동안 먹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문헌에 남은 가장 이른 자취 가운데 하나는 1548년 토스카나 대공가에 도착한 토마토 한 바구니인데, 메디치가 사람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의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1544년 이탈리아의 약초학자 피에트로 안드레아 마티올리는 이 열매를 가지과의 맨드레이크 무리로 분류했는데, 그 집안에는 벨라도나처럼 독을 품은 식물이 적지 않았습니다. 1597년 영국의 존 제라드는 자신의 『허벌』에서 토마토를 두고 ‘역하고 고약한 냄새’라 적었고, 이 한 줄이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오래 힘을 발휘했습니다.
‘독사과’라는 별명과 ‘200년’이라는 기간은 이 시기를 요약하는 말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만 유럽 전체에 고르게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의심이 길게 간 곳은 주로 영국과 북유럽이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17세기에 이미 토마토가 부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황금 사과, 사랑의 사과
이름에는 그 시절의 눈길이 남아 있습니다. 마티올리는 1544년에 이 열매를 ‘말라 아우레아(mala aurea)’, 곧 ‘황금 사과’라 적었습니다. 처음 들어온 것이 노란빛이었기 때문인데, 이탈리아어 ‘포모도로(pomodoro)’가 여기서 왔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사랑의 사과(pomme d’amour)’라 하여 최음제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먹기는 두려워하면서도, 이름만은 곱게 붙인 셈입니다.
접시 탓이라는 이야기
널리 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토마토를 먹고 탈이 난 유럽 귀족들의 진짜 원인은 토마토가 아니라 접시였다는 것 — 백랍(주석 합금) 식기에 섞인 납을 산이 강한 토마토가 녹여 냈다는 설명입니다. 깔끔하고 그럴듯해서 여기저기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당대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토마토를 다룬 역사가들은 초기의 의심이 중독 사고가 아니라 갈레노스식 체액 의학의 분류, 그리고 가지과 식물에 대한 통념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화학적으로도 토마토의 산이 백랍에서 녹여 낼 납의 양은 중독을 일으킬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사실로 못 박기에는 근거가 약합니다.
마침내 식탁으로
기록으로 남은 첫 토마토 소스는 1692년 나폴리에서 나왔습니다. 궁정 집사이자 요리사였던 안토니오 라티니가 『현대의 집사』에 ‘스페인식 토마토 소스’를 적었는데, 다진 토마토에 양파와 타임, 소금을 넣어 끓인 것으로 파스타가 아니라 고기와 생선에 곁들이는 소스였습니다. ‘스페인식’이라 부른 것으로 미루어, 스페인 쪽이 한발 앞섰던 듯합니다.
토마토가 국수와 만난 기록은 그보다 한참 뒤입니다. 1837년 나폴리의 이폴리토 카발칸티가 펴낸 요리서에 ‘토마토를 곁들인 베르미첼리’가 실렸고, 이것이 오늘날 확인되는 가장 이른 토마토 파스타 조리법입니다. 한 번 식탁에 오르자, 토마토는 빠르게 세계의 붉은 맛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토마토
한국에는 1600년대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봅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 ‘남만시(南蠻枾)’가 나오는데 — 풀에서 나는 감으로 봄에 심어 가을에 열매를 맺고 맛이 감과 비슷하다는 설명입니다 — 이를 토마토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처음에는 역시 먹기보다 보는 관상용이었습니다. 지금은 여름 과채로, 또 짭짤한 땅에서 단맛을 끌어올린 대저 토마토처럼 산지마다 다른 얼굴로 식탁에 오릅니다.
가장 익숙한 붉은 열매가, 가장 늦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낯섦이 익숙함이 되기까지는, 늘 그만한 시간이 듭니다.
참고: David Gentilcore, 『Pomodoro! A History of the Tomato in Italy』(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Andrew F. Smith, 『The Tomato in America』; Razifard 외, 「Genomic Evidence for Complex Domestication History of the Cultivated Tomato in Latin America」(Molecular Biology and Evolution, 2020); 마티올리 『디오스코리데스 주해』(1544), 존 제라드 『허벌』(1597), 안토니오 라티니 『Lo Scalco alla Moderna』(1692), 이폴리토 카발칸티 『Cucina teorico-pratica』(1837); 이수광 『지봉유설』(1614); 맥길대 과학사회국(OSS) 납 식기설 검토. 재배화 연대는 연구에 따라 폭이 있어 범위로 적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2026.06.15 — cooktalk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