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어
골동밥(骨董飯) — 여러 가지를 한데 섞은 밥, 곧 비빔밥의 옛 이름.
혼돈반 → 골동반 → 부빔밥 → 비빔밥. 한 그릇이 거쳐 온 이름들.
지금 우리가 비빔밥이라 부르는 한 그릇에는, 사실 여러 개의 옛 이름이 포개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멋스러운 이름이 골동밥, 곧 골동반(骨董飯)입니다. 글자만 보면 뼈와 항아리처럼 보이지만 뜻은 전혀 다릅니다 — 여러 가지를 어지럽게 한데 섞는다는 말입니다.
골동(骨董) — 섞는다는 말
골동은 본디 여러 가지를 한데 뒤섞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의 내력을 적어 둔 것은 소동파(1036~1101)의 『구지필기(仇池筆記)』입니다. 나부(羅浮)의 영노(穎老)가 여러 가지 음식을 얻은 다음 모두 섞어서 끓여 먹었는데, 이것을 골동갱(骨董羹)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지요. 여기서 골동은 재료를 가리지 않고 뒤섞는다는 뜻을 얻었고, 그 섞음의 뜻이 국에서 밥으로 건너와 골동반이 되었다고 봅니다.
한자 표기도 문헌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골동반(骨董飯)이 가장 흔하고, 골동반(汨董飯)으로 적힌 곳도 있습니다. 즉 골동밥은 뼈다귀 밥이 아니라, 이것저것 섞은 밥입니다.
이름의 계보 — 혼돈반에서 비빔밥까지
한 그릇이 이름을 갈아입어 온 길이 옛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 17세기 초 · 혼돈반(混沌飯) —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 혼돈은 뒤섞여 구분이 없는 상태를 이릅니다.
- 18세기 · 골동반(骨董飯) — 권상일(1679~1760)의 일기 『청대일기(淸臺日記)』. 같은 무렵 이익의 『성호전집』은 골동(骨董)으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는 골동반(汨董飯)으로 적었습니다.
- 1810년 · 브뷔음 — 장혼의 학습용 백과서 『몽유편(蒙喩篇)』에 이 한글 표기가 나옵니다. 현재 확인되는 가장 이른 우리말 표기입니다.
- 1870년 · 골동반 = 부빔밥 — 『명물기략(名物紀略)』은 한자로는 골동반이라 쓰고 부를 때는 부빔밥(捊排飯)이라 한다고 풀어 둡니다.
- 1800년대 말 · 부븸밥 — 『시의전서(是議全書)』에 한글 이름과 함께 조리법이 자세히 오릅니다.
가장 이른 기록인 『기재잡기』의 대목은 이렇습니다 —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이르는 혼돈반과 같이(如俗所謂混沌飯) 만들고.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세상에서 이르는’이라는 한마디입니다. 글을 쓰던 때 이미 혼돈반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흔한 말이었다는 뜻이니까요. 기록은 17세기 초지만, 음식은 그보다 앞섭니다.
혼돈반과 골동반이라는 한자 이름과 브뷔음, 부빔밥, 부븸밥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오래 나란히 쓰이다가, 지금의 비빔밥 하나로 모인 셈입니다.
시의전서의 골동반 — 글로 적힌 조리법
『시의전서』는 1800년대 말 경상도 상주의 반가에서 전해 오던 조리서입니다. 오늘 전하는 본은 1919년 상주군수로 부임한 심환진이 그곳 반가에 소장된 조리책을 빌려 괘지에 베낀 것이 며느리 홍정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안동의 『수운잡방』, 영양의 『음식디미방』과 함께 경북의 세 조리서로 꼽힙니다.
원문 그대로
부븸밥(골동반)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 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과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말로만 오가던 한 그릇이 비로소 문헌이 된 자리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한 줄 — 비빔밥에는 잡탕국을 곁들인다는 상차림까지 적어 둔 대목입니다. 재료와 순서만이 아니라 밥상의 꼴까지 함께 남은 셈입니다.
※ 『시의전서』를 비빔밥의 최초 기록으로 소개하는 글이 많지만, 정확히는 조리법이 자세히 적힌 이른 문헌입니다. 이름만 놓고 보면 한자 표기는 17세기 『기재잡기』가, 한글 표기는 1810년 『몽유편』의 브뷔음이 앞섭니다.
비빔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옛 기록 속 비빔은 갈래가 여럿입니다. 이규경(1788~1856)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채소비빔밥, 잡비빔밥, 회비빔밥, 전어비빔밥, 대하비빔밥, 게장비빔밥, 달래비빔밥, 생오이비빔밥, 김가루비빔밥, 고추장비빔밥 등이 줄지어 소개됩니다. 지역의 특산물을 적으면서는 평양의 감홍로와 냉면과 골동반을 나란히 들기도 했습니다.
쓰는 재료가 바뀌면 이름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면 한 갈래가 더 생겼습니다. 섞는다는 한 동작 위에서 여러 얼굴이 퍼진 것입니다.
※ 더러 골동밥의 출처로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을 들기도 하나, 도문대작에는 비빔밥과 골동밥 기록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위의 기재잡기, 청대일기, 명물기략, 시의전서가 더 분명한 근거입니다.
골동, 섞임의 미학
골동반이라는 이름이 알려 주는 건, 비빔밥이 가지런히 정리된 한 그릇이 아니라 잘 섞인 한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로 담겨 있던 것들이 한 그릇에서 부딪치고 비벼져 새 맛이 되는 일 — 그 섞임을 옛사람은 골동(骨董)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이 촌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빔밥이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히 적은 한 단어입니다.
곁들임 · 고문헌 속 다른 밥 이름들
- 골동밥 = 비빔밥(갖은 나물과 고기를 섞어 비빈 밥)
- 맥밥(麥飯) = 보리밥(쌀과 보리를 섞어 지은 밥)
- 갱식밥 = 김칫국에 흰밥을 넣고 끓인 김칫국밥
- 돈채밥 = 돼지고기를 채썰어 쌀과 함께 지은 밥
- 금밥 = 황색 국화 잎을 끓인 물로 지은 밥
전통식품 고문헌에 오른 밥만 해도 80가지에 이릅니다. 죽과 미음과 응이까지 더하면 220가지가 넘어, 죽은 따로 한 사전을 이룰 만큼입니다.
낱말 풀이
- 골동갱(骨董羹) — 갖은 재료를 한 솥에 넣어 끓인 국. 소동파의 『구지필기』에 그 유래가 적혀 있다.
- 혼돈(混沌) — 뒤섞여 구분이 없는 상태. 혼돈반은 그 상태를 밥에 갖다 붙인 이름이다.
- 간납 — 생선이나 고기를 저며 썰어 지진 전유어. 시의전서의 비빔밥에 올라간다.
- 남새 — 나물을 이르는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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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재잡기』, 『청대일기』, 『성호전집』, 『청장관전서』, 『몽유편』(1810), 『명물기략』(1870), 『오주연문장전산고』, 『시의전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빔밥과 시의전서 항목(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문은 해당 문헌의 기존 번역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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