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어
타락죽(駝酪粥) — 쌀을 갈아 끓이다 우유를 섞어 쑨 죽. 우유죽이라고도 했습니다.
수라간이 아니라 내의원에서 쑤던, 약에 가까운 죽.
화려한 밥상이 아닙니다. 하얗고 묽은, 별다른 고명도 없는 죽 한 그릇 — 그런데 이 소박한 죽이, 조선의 궁중에서는 아무나 손대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타락죽, 곧 우유로 쑨 죽 이야기입니다.
수라간이 아니라, 내의원에서
1849년에 나온 홍석모의 세시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음력 시월 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 내의원에서 우유락(牛乳酪)을 만들어 시월 초하루부터 정월까지 나라에 진상하며, 기로소(耆老所)에서도 이때부터 이것을 만들어 모든 기신(耆臣)에게 정월 보름까지 공양한다고요. 철 맞춰 나는 나물처럼, 이 죽에도 철이 있었던 셈입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죽을 끓인 곳이 수라간이 아니라 내의원이었다는 점입니다. 음식을 짓는 소주방이 아니라 약을 다루는 내의원에서 쑤었다는 것은, 타락죽을 밥보다 약 쪽에 놓고 다루었다는 뜻입니다. 젖을 짜는 일까지 내의원 의관의 소관이었으니, 재료를 관리하고 처방하는 순서에 가까웠습니다.
원문 그대로 — 내의원의 법
쑤는 법이 글로 남은 것도 있습니다. 1800년대 초 빙허각 이씨가 엮은 한글 가정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의 한 대목입니다.
쌀을 담갔다가 갈아 밭치고, 생우유가 한 사발이면 쌀을 곱게 간 무리는 다소 적게 넣는다. 묽고 되기는 잣죽 알심 크기로 하여 먼저 쑤다가 반쯤 익으면 우유를 부어 섞어 쑨다. 이것이 내의원의 우유죽 쑤는 법이다.
재료는 둘뿐입니다. 쌀과 우유. 그런데 순서가 까다롭습니다 — 우유를 처음부터 부어 끓이면 안 되고, 쌀물로 먼저 죽을 쑤다가 반쯤 익은 뒤에야 우유를 부어 섞습니다. 밋밋해 보이는 그릇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던 겁니다.
우유가 귀하던 시절
지금이야 우유가 흔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젖을 얻는 용도로 개량된 젖소가 없었으니, 우유는 소가 새끼를 낳았을 때나 잠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부담도 컸습니다. 성종 12년(1481)에는 타락을 사치한 식품으로 보아 궁으로의 봉진을 국가 차원에서 감해 준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반대도 적지 않았습니다. 젖을 짜려면 새끼가 먹을 것을 덜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암소 뒤를 송아지가 따라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어공(御供)의 낙죽을 멈추라 명했고, 뒤에도 여러 번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라며 진상을 정지시켰습니다. 가장 귀한 죽이 동시에 가장 자주 물리던 죽이었던 셈입니다.
그럼, 누가 먹었나
흔히 임금만 먹던 죽이라 일컫지만, 기록을 따라가 보면 조금 더 넓습니다. 대비와 중전과 세자가 들었고, 앞서 본 대로 기로소에 든 노신들에게도 정월 보름까지 올랐습니다. 몸이 아픈 제신(諸臣)과 왕족에게 보신으로 내리기도 했고, 1609년 명나라 사신을 맞았을 때 차린 조반상에도 가운데 그릇으로 타락죽이 올랐습니다.
다만 그 밖으로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명종 20년(1565),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은 윤원형의 죄목을 적으면서 “사복시의 타락죽은 상공(上供)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낙부(酪夫)가 기구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였다”는 대목을 사치하고 참람한 죄 조목에 넣었습니다. 사사로이 해 먹는 것 자체가 탄핵 사유가 될 만큼, 타락죽은 대궐의 것이었습니다. 임금만 먹었다는 말은 지나치고,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는 말은 맞습니다.
타락이라는 말 — 바다 건너온 이름
이름의 타락(駝酪)은 원래 우리말이 아닙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풀이는, 젖을 삭힌 유제품을 가리키는 몽골어 타라그(tarag)를 한자로 음차해 타락(駝酪)이라 적었다는 것입니다. 고려 말 원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유목민의 젖 문화가 이름으로 묻어 왔다는 설명이지요.
다만 이것이 유일한 풀이는 아닙니다. 돌궐어 torak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타(駝)가 낙타를 뜻하는 글자인 만큼 본래 낙타 젖으로 만들던 유장(油漿)을 가리키던 말이 소와 양과 말의 젖으로 넓혀졌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우리말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기록상 가장 이른 용례는 1459년 『월인석보』에 나옵니다.
그래서 타락은 우유를, 때로는 젖을 삭힌 유제품까지 넓게 가리키는 옛말이 되었고, 그 타락으로 쑨 죽이 바로 타락죽입니다. 한 그릇의 이름 안에, 바다 건너의 초원과 조선의 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곁들임 · 보양으로 쓰던 죽들
- 타락죽 = 우유로 쑨 죽. 내의원이 쑤어 올리던 죽.
- 잣죽 = 쌀과 잣을 곱게 갈아 쑨 죽.
- 전복죽 = 다진 전복을 넣어 쑨 귀한 죽.
- 흑임자죽 = 검은깨를 갈아 쑨 죽.
- 닭죽 = 영계 고은 국물에 쌀을 넣어 쑨 죽.
가장 귀한 죽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희고 묽고, 따뜻했을 뿐입니다. 귀함은 때로 요란함이 아니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을 조용히 담아내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낱말 풀이
- 내의원(內醫院) — 왕실의 약을 맡던 관청. 내국(內局)이라고도 했다.
- 기로소(耆老所) — 나이 든 고위 관료를 예우하던 관청. 이곳에서도 시월부터 정월 보름까지 타락죽을 만들어 노신들에게 올렸다.
- 무리 — 물에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 체에 밭쳐 가라앉힌 앙금. 타락죽의 바탕이 된다.
- 봉진(封進) — 지방에서 궁으로 물품을 올리는 일. 임금이 타락 봉진을 멈추라 명한 기록이 여러 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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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의 서술이며 오늘의 의학·영양 정보가 아닙니다. 참고: 『동국세시기』(1849)·『규합총서』·『수운잡방』, 『조선왕조실록』 성종 12년 7월 13일·명종 20년 8월 14일·영조대 여러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사전 타락(駝酪) 항목(한국학중앙연구원). 타락의 어원은 몇 가지 설이 나란히 있어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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