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전서 · 반상도식 — 한 상의 문법

『시의전서』의 맨 뒤, 두 면. 거기에는 조리법이 한 줄도 없다. 대신 작은 원들이 무리 지어 있다. 원 하나에 음식 이름 하나. 어떤 원은 더 작아 장(醬)을 담는 종지를 나타내고, 어떤 음식들은 사각 틀 안에 가지런히 적혔다. 백오십 년 전 누군가가,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놓는가’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이 두 면이 반상도식(飯床圖式)이다.

조리법은 다른 조리서에도 있다. 그러나 완성된 음식이 한 상 위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한 끼를 이루는지, 그 배치를 도면으로 정착시킨 것은 시의전서가 처음이다. 음식 하나하나가 ‘점’이라면, 반상도식은 그 점들을 잇는 문법이다.

첩이란 무엇인가

먼저 한 단어를 짚어야 한다. 첩(楪). 첩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 곧 쟁첩에 담은 요리를 이른다. 반상에서는 밥·탕(국)·김치·장·조치(찌개)·찜 같은 기본을 빼고, 쟁첩에 담은 반찬의 수를 헤아려 상의 격을 나눈다. 그 수에 따라 삼첩·오첩·칠첩·구첩, 그리고 궁중의 십이첩이 된다. 첩수로 등급을 나눈 이 반상 차림이 그림과 글로 처음 정착된 자리가, 바로 시의전서의 이 두 면이다.

조치 주석 — ‘조치’는 국(갱, 羹)·탕(湯)처럼 훌훌 마시는 국물과 달리, 국물을 자작하게 잡아 건더기와 함께 짭조름하게 끓여 낸 오늘날의 ‘찌개’를 이르는 궁중·반가의 옛말이다. 기본 음식에 들어 첩수에는 세지 않는다.


세 개의 반상 — 구첩에서 오첩으로

가장 격이 높은 것이 구첩반상이다. 아래 중심에 밥과 국을 놓고, 가운데에 조치 셋(생선조치·양조치·맑은조치)과 장 셋(간장·겨자·초장)을 둔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육구이·생선구이·쌈·나물·회·숙육·전유어·좌반·젓갈 아홉 반찬이 둥글게 둘러앉는다. 한 상이 곧 하나의 작은 원형 정원이다.

시의전서 구첩반상 반상식도 — 밥·국·조치 셋·장 셋과 아홉 반찬 배치 (쿡톡 일러스트)

첩수가 줄면 상은 단정해진다. 칠첩반상은 구첩에서 조치 하나와 구이 하나, 전유어가 빠진다. 반찬은 일곱.

시의전서 칠첩반상 반상식도 — 반찬 일곱의 배치 (쿡톡 일러스트)

오첩반상은 거기서 다시 조치 하나와 쌈·회 두 찬, 그리고 겨자가 빠진다. 반찬은 다섯. 같은 문법 위에서, 격에 따라 음식이 더해지고 덜어진다. 반상도식은 그 더하고 덜어내는 규칙을 한눈에 보여 준다.

시의전서 오첩반상 반상식도 — 반찬 다섯의 배치 (쿡톡 일러스트)

네 개의 보조상 — 상마다 제 몫이 있다

반상도식에는 밥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리와 쓰임이 다른 네 개의 상이 사각 틀 안에 따로 그려져 있다.

술상은 주안상이다. 오른쪽부터 진안주·마른안주·김치·정과·생실과를 놓고, 가운데에 술잔과 초장, 그리고 술주전자를 둔다. 술과 안주가 한 상에서 균형을 이룬다.

시의전서 술상(주안상) 반상식도 — 잔·초장·주전자와 안주 배치 (쿡톡 일러스트)

곁상은 전골상이다. 왼쪽부터 전골·장국·나물·계란·기름종지. 전골을 끓일 국물과 건지를 받쳐 두는, 본상을 돕는 상이다.

시의전서 곁상(전골상) 반상식도 — 전골·장국·나물 배치 (쿡톡 일러스트)

신선로상은 신선로 하나를 위한 상이다. 가운데 신선로를 놓고, 장국(장국시)과 사시 — 자루가 짧은 사기 숟가락 — 를 곁들인다. 한 그릇이 상의 주인공이 되는 드문 경우다.

시의전서 신선로상 반상식도 — 신선로·장국·사시 (쿡톡 일러스트)

입맷상은 잔치의 상이다. 혼례 같은 큰 잔치에서, 축하받는 당사자가 긴 의례 동안 시장하지 않도록 따로 차리는 국수장국상이다. 가운데 아래 국수를 두고 초장을 곁에 놓은 뒤, 둘레에 숙육·전유어·찜·수란·장김치·탄평채·정과·생실과·수정과를 둘러 낸다. 정식 식사가 아니라 ‘입맛을 다시는’ 가벼운 상이라는 뜻이 이름에 담겼다.

시의전서 입맷상 반상식도 — 국수장국상의 배치 (쿡톡 일러스트)

한 상의 문법

반상도식이 알려 주는 것은, 한식이 그저 음식의 모임이 아니라 자리의 질서라는 사실이다. 밥과 국은 어디에 두고, 장은 종지에 담아 어디에 놓으며, 반찬은 격에 따라 몇 가지를 둘러야 하는가. 옛 부엌은 그것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도면으로 남겼다. 음식 하나를 잘 짓는 일과, 그 음식들을 한 상으로 차려 내는 일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 두 면은 시의전서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식탁 그 자체인 까닭이 된다. 만드는 법이 ‘점’이라면, 차리는 법은 그 점들 사이의 거리다. 거리를 적어 둔 책은, 그 시대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서로를 대접했는지를 함께 적어 둔 것이기도 하다.


낱말 풀이 〈이 글의 옛말〉

  • 좌반(佐飯) — 자반. 소금에 절이거나 양념해 말린 마른반찬.
  • 숙육(熟肉) — 삶아 익힌 고기, 곧 수육.
  • 전유어(煎油魚) — 기름에 지진 전. ‘저냐’라고도 한다.
  • 진안주·마른안주 — 진안주는 국물·즙이 있는 안주, 마른안주는 마른 안주.
  • 정과(正果) — 과일이나 뿌리를 꿀·조청에 졸인 과자.
  • 생실과(生實果) — 익히지 않은 제철 과일.
  • 장국시 — 맑은장국. 신선로에 부어 먹는 맑은 국물.
  • 사시(沙匙) — 자루가 짧은 사기 숟가락.
  • 수란(水卵) — 끓는 물에 깨뜨려 반숙으로 익힌 달걀.
  • 탄평채 — 오늘날의 탕평채(蕩平菜). 청포묵에 고기·미나리·김 등을 무친 음식. 원도 표기를 따라 ‘탄평채’로 적었다.

도판: 위 일곱 장은 원도(『시의전서』 반상식도)의 배치를 판독하고 전통문화포털 한식문화사전 「반상식도(『시의전서』)」와 대조해 쿡톡이 새로 그린 자체 일러스트다. 원도의 표기 규칙 — 큰 원=음식, 작은 원=장(종지), 보조상=사각 틀 — 을 살렸다. 원문은 저작권이 소멸된 공유 자료이며, 본 일러스트는 쿡톡 제작물이다.

근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의전서」·「반상」·「식기」, 전통문화포털 한식문화사전 「반상식도」, 우리역사넷, 영남일보 상주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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