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전서 — 한 관리의 붓끝에서 살아남은 식탁

우리가 『시의전서(是議全書)』라 부르는 책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이 아니다.

1919년 무렵, 상주군수 심환진은 고을 반가(班家)에 전해 오던 조리책 한 권을 빌렸다. 그리고 상주군청에서 쓰던 인쇄 괘지 — 1911년 문을 연 대구인쇄합자회사가 찍은 편면괘지(片面罫紙) — 에 붓으로 그 내용을 한 글자씩 옮겨 적었다. 그 손글씨가 며느리 홍정(洪貞)에게 건너갔다. 빌렸던 원서는 그 뒤로 행방을 알 수 없다. 지금 우리 앞에 남은 것은, 한 관리가 옮겨 적은 한 권뿐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두 사람의 시간이 포개져 있다. 1800년대 말, 경상도의 한 반가에서 음식을 짓고 그 법을 적어 내려간 누군가의 시간. 그리고 1919년, 그 책이 사라질까 염려해 베껴 둔 한 관리의 시간. 저자의 이름은 끝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책에 짙게 밴 경상도 말씨가, 그 부엌의 자리를 어렴풋이 가리킬 뿐이다.

심환진, 그리고 옮겨 적는다는 일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관료다. 호는 산남(山南), 본관은 청송. 한성에서 나고 자라 하양·성주·상주·칠곡의 군수를 지냈다. 그가 상주에서 남의 집 조리책을 빌려 손수 옮겨 적은 까닭은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행위 자체가 한 가지를 말해 준다. 사라지면 안 될 것이 있었고, 그것을 한 글자씩 붙들어 둔 손이 있었다.

(서지에는 작은 어긋남도 있다. 식품사 자료는 그가 1919년 상주군수로 부임했다고 적고, 인물 기록은 1914년 9월 상주군수로 임명되었다고 적는다. 분명한 것은 필사 자체가 1919년경 상주군수 재임 중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런 어긋남까지 그대로 적어 두는 것이, 원문에서 출발하는 책의 태도다.)

이름이 곧 태도다

시의전서. 옳다고 여겨 가려 적은 글의, 온전한 책. 무엇이 옳은 조리법인지를 묻고 가려 한 권으로 묶었다는 뜻이다. 이름부터 ‘맛있게 만드는 법’이 아니라 ‘바르게 적는 일’에 무게가 실려 있다.

실제로 이 책은 그 이름값을 한다. 헤아리면 사백스물두 가지. 주식류 27종, 부식류 189종, 기호식품 107종, 주류 19종, 장과 조미료 7종. 한 집안의 밥상이 아니라 반가에서 궁중에 이르는 한 시대의 식탁이 통째로 들어 있다. 그것도 음식 만드는 법에서 멈추지 않는다. 장을 담그고 술을 빚는 법, 식재료를 보관하고 채소를 구분하는 법, 그리고 상을 차리는 법과 천을 물들이는 염색법, 빨래하는 서답법까지. 재료에서 보관으로, 조리에서 상차림으로 이어지는 한 끼의 전 주기가 한 권에 담겼다. ‘조선 최고의 음식 데이터베이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다.

세 기둥 가운데 — 깊이·넓이·체계

시의전서는 흔히 안동의 수운잡방, 영양의 음식디미방과 더불어 우리 조리서의 세 기둥으로 꼽힌다. 그러나 셋은 같은 종류의 책이 아니다. 음식디미방은 한 어머니의 책이다. 1670년 무렵, 일흔다섯의 장계향이 딸과 며느리에게 남기려 적은 한 종가의 맛 — 백마흔여섯 가지다. 규합총서는 한 집의 책이다. 1809년 무렵 빙허각 이씨가 음식부터 옷과 농사, 육아와 응급까지 살림 전체를 묶은 총서이며, 음식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이다. 시의전서는 한 시대의 책이다. 저자의 이름조차 전하지 않지만, 한 고장에서 궁중에 이르는 음식을 조리법별로 가려 정리했다. 음식디미방이 ‘깊이’라면 규합총서는 ‘넓이’이고, 시의전서는 ‘체계’다.

가장 놀라운 두 면 — 반상도식

그 체계의 끝, 책의 맨 뒤 두 면에 다른 어떤 조리서에도 없는 것이 그려져 있다. 반상도식(飯床圖式), 곧 상차림 도면이다. 구첩반상·칠첩반상·오첩반상, 그리고 술상·곁상·신선로상·입맷상. 작은 원마다 음식 이름을 하나씩 적고, 그 원들을 모아 둥근 상 위의 그릇을 그렸다. 여기서 ‘첩수’란 밥·국·김치·조치·장 같은 기본을 빼고, 쟁첩(뚜껑 있는 반찬 그릇)에 담는 반찬의 수를 말한다.

조치 주석 — ‘조치’는 국물이 많아 훌훌 마시는 국(갱, 羹)이나 탕(湯)과 달리, 국물을 자작하게 잡아 건더기와 함께 짭조름하게 끓여 낸 오늘날의 ‘찌개’를 이르는, 조선시대 궁중과 양반가의 옛말이다.

조리법은 다른 조리서에도 있다. 그러나 완성된 음식을 어떤 격식으로, 어디에 놓아 한 상을 이루는가를 그림으로 표준화한 것은 시의전서가 처음이다. 음식 하나하나가 ‘점’이라면, 반상도식은 그 점들을 잇는 ‘문법’이다.

처음 적힌 이름들

시의전서에는 ‘처음’이 여럿이다. 우리가 무심히 부르는 비빔밥이 ‘부븸밥(골동반)’이라는 한글 이름과 조리법으로 문헌에 처음 오른 자리가 이 책이고, 배추통김치의 조리법이 처음 적힌 자리도 이 책이다. 짙은 경상도 사투리는, 이 책이 어느 지역 반가의 부엌에서 왔는지를 말없이 가리킨다.

그 뒤의 시간

한 관리가 옮겨 적어 남긴 책은, 다시 두 번 되살아났다. 한 번은 학문으로. 식품사학자 이성우가 『한국식경대전(韓國食經大典)』(1981)에서 이 책을 우리 식생활사의 중요한 자료로 정리하며 학계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 한 번은 식탁으로. 상주시는 2018년부터 시의전서의 음식 일흔여 종을 복원해 지역 식당에 되살렸다. 사라질 뻔한 한 권이, 백 년을 건너 다시 상에 오른 셈이다.

빌려 적은 책. 그 사실이 오히려 이 책의 마음을 말해 준다. 사라질 뻔한 것을 누군가 한 글자씩 옮겨 적어 남겼고, 그 덕에 백오십 년 전의 부엌이 오늘의 식탁에 닿는다. 이제 우리가 그 옮겨 적기를 한 번 더 잇는다. 원문에서 출발해, 비교를 거쳐, 해석은 맨 마지막에 둔다. 옛글을 먼저 그대로 펼치고(결락은 짐작으로 메우지 않는다), 다른 문헌·시대와 견주어 본 다음, 해설은 아낀다. 검색하면 나오는 요약을 옮기지 않고, 한 음식씩 천천히 — 약식에서 송편으로, 약과에서 수정과로 — 다시 차려 볼 참이다.

낱말 풀이 〈이 글의 옛말〉

  • 반가(班家) — 양반의 집안.
  • 편면괘지(片面罫紙) — 한쪽 면에만 인쇄용 괘선(붉은 줄)을 친 종이. 심환진이 이 괘지에 시의전서를 옮겨 적었다.
  • 부븸밥·골동반(骨董飯) — 비빔밥의 옛 한글·한자 이름. 여러 재료를 한데 섞는다는 뜻.
  • 서답법 — 빨래하는 법. 시의전서에는 염색법과 함께 살림법까지 실려 있다.

근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의전서」, 전통문화포털 한식문화사전 「반상식도(『시의전서』)」, 영남일보 상주 스토리텔링 기획, 이성우 『한국식경대전』(1981), 한국어 위키백과 「심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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