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규경은 골동반 열두 갈래 가운데 하나로 고추장 골동반을 꼽았고, 조리서들은 1970년까지 비빔밥을 고춧가루로 비볐다. 진주의 육회와 엿고추장, 전주의 콩나물, 1978년 시판 고추장까지 — 고추장이 비빔밥의 기본이 되기까지.
연재 「비빔밥은 어디서 왔나」 ④
장날 읍내 식당에서 비빔밥을 시키면 나물 위에 고추장 한 숟갈이 얹혀 나온다. 모자라면 식탁 위 빨간 통에서 더 덜어 넣는다. 마트 장류 진열대에는 고추장 통이 층층이 쌓여 있다. 지금 비빔밥과 고추장은 한 몸처럼 보인다.
그런데 앞의 세 편에서 만난 비빔밥에는 고추장이 없었다. 『시의전서』는 고춧가루로, 헛제삿밥은 간장으로 비볐다. 그렇다면 고추장은 언제부터 비빔밥의 기본이 되었을까.
열두 가지 골동반 가운데 하나
먼저 짚어 둘 것은, 고추장 비빔밥이 20세기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산주자미변증설」에 골동반을 이렇게 늘어놓았다.
菜蔬骨董飯。以平壤爲珍品。如雜骨董飯、鯔膾鮆膾鰣膾芥醬骨董飯、鱅魚新出炙骨董飯、乾大鰕屑蝦米屑骨董飯、黃州細蝦醢骨董飯、蝦卵骨董飯、蟹醬骨董飯、蒜骨董飯、生胡瓜骨董飯、油鹽炙海衣屑骨董飯、美椒醬骨董飯、炒黃豆骨董飯。人皆嗜爲珍美。
나물 골동반은 평양 것을 으뜸으로 친다. 잡골동반, 숭어·웅어·준치 회를 겨자장에 비빈 골동반, 햇 용어(鱅魚) 구이 골동반, 말린 새우 가루 골동반, 황주 곤쟁이젓 골동반, 새우알 골동반, 게장 골동반, 마늘 골동반, 생오이 골동반, 기름소금 발라 구운 김 가루 골동반, 좋은 고추장 골동반, 볶은 콩 골동반 같은 것을 사람들이 모두 즐겨 별미로 여긴다.
회는 겨자장에, 어떤 것은 게장이나 곤쟁이젓에 비볐다. 고추장(美椒醬)은 열두 갈래 가운데 한 자리였다. 고추장 비빔밥은 있었지만 기본값은 아니었다. 두 세대쯤 뒤의 『시의전서』가 고춧가루로 비빈 것도 이 흐름 안에 있다.
조리서는 1970년에야 고추장을 적었다
20세기 가정 조리서들은 비빔밥 양념을 어떻게 적었을까. 한국식품연구원 김유진·장대자(2018)가 여러 조리서를 견주었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1921),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36년판), 방신영의 『조선음식 만드는 법』(1946), 손정규의 『우리음식』(1948)이 모두 고춧가루였다. 1954년과 1966년의 책은 양념을 따로 적지 않았고, 고추장은 1970년의 『조선요리』에서 처음 나온다.
집에서 보고 따라 하는 책이 고추장을 적기까지 반세기가 걸린 것이다. 그런데 책보다 먼저 고추장으로 비빔밥을 내던 곳이 있었다. 식당이다.
진주 — 육회 곁의 고추장
진주비빔밥은 일찍부터 이름이 났다. 1925년 잡지 『개벽』과 1929년 『별건곤』의 팔도 명물 기사에 진주 비빔밥이 소개되었다고 전하고,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진주의 명물로 비빔밥을 꼽았다. 진주가 경남 관찰부 소재지가 된 1896년 무렵 관찰사가 즐긴 음식이 ‘진주화반’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그 원전은 확인하지 못했다.
오늘의 진주비빔밥은 사골이나 양지 국물로 지은 밥에 다섯 가지 나물과 돌김을 얹고, 바지락살로 끓인 보탕국을 끼얹어 비빈다. 그 위에 쇠고기 우둔살 육회와, 물엿과 황설탕을 더한 ‘엿고추장’을 올린다. 놋그릇 위의 빛깔이 꽃 같다고 꽃밥, 칠보화반이라고도 부른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는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간 시작을 일제강점기 진주로 본다. 진주 우시장 주변에서 비빔밥에 육회를 얹었고, 그 비린 맛을 잡으려 고추장을 썼다는 것이다. 이 풀이대로라면 고추장은 처음에 비빔밥의 양념이라기보다 육회의 짝으로 들어왔다. 진주의 오래된 비빔밥집 천황식당은 1915년에 문을 열었다고도, 1929년이라고도 하며 영업신고증의 날짜는 1965년이다.
전주 — 콩나물 곁의 고추장
『조선상식문답』이 진주를 비빔밥으로 꼽을 때 전주는 콩나물로 꼽혔다고 전한다. 전주가 비빔밥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그 뒤다. 한식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1952년 이분례 씨가 연 한국집이 전주비빔밥을 내건 첫 전문 식당으로 꼽힌다.
전주비빔밥은 소머리 국물로 밥을 짓고, 콩나물을 넣고, 황백 지단과 날 노른자를 얹고, 콩나물국을 곁들인다. 그리고 고추장으로 비빈다. 국어학자 이태영(2003)은 전주 비빔밥 고추장의 특징을 물엿이나 설탕 없이 찹쌀, 메줏가루, 엿기름으로 단맛을 내는 데서 찾았다. 진주는 엿을 넣은 고추장, 전주는 엿기름으로 단맛을 낸 고추장. 두 고장은 제 고추장을 얹으며 비빔밥의 이름을 얻었다.
사 먹는 고추장, 하늘 위의 비빔밥
식당의 고추장 비빔밥이 집 밥상까지 내려온 데에는 고추장을 사 먹게 된 변화가 겹친다. 업계 기록으로는 1978년 해찬들의 전신 삼원식품이 고추장을 처음 상품으로 내놓았고, 1983년 쌈장, 1989년 대상 청정원의 순창고추장이 뒤를 이었다. 장독에서 퍼 쓰던 장이 가게 선반에 오른 무렵이, 조리서가 비빔밥에 고추장을 적기 시작한 때와 겹친다.
1997년 대한항공은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냈고, 이듬해 기내식 업계의 머큐리상을 받았다. 고추장을 곁들인 비빔밥이 한국 음식의 얼굴로 바깥에 알려진 계기다. 그리고 앞 편에서 보았듯 2000년 무렵에는 간장으로 비비던 안동 헛제삿밥 상에도 고추장 종지가 놓였다.
가장 넓어진 한 갈래
네 편을 지나오면 처음의 물음이 조금 달라진다. 비빔밥은 처음부터 고추장의 음식이 아니었다. 19세기에는 겨자장, 게장, 젓갈, 고추장으로 비비는 여러 갈래가 있었고, 상주 반가의 부엌은 고춧가루와 깨소금과 기름을, 제사의 밥은 간장을 골랐다. 고추장은 20세기 진주와 전주의 식당에서 육회와 콩나물 곁에 올라 고장의 이름이 되었고, 사 먹는 고추장과 함께 집 밥상으로, 하늘 위로 퍼졌다.
그러니 고추장 비빔밥은 틀린 것도, 늦게 온 가짜도 아니다.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가 가장 넓은 길이 되었을 뿐이다. 그 길 옆에 고춧가루로 비빈 상주의 한 그릇과 간장으로 비빈 대구 장터의 한 그릇이 아직 남아 있다.
오늘 부엌에서 해 볼 일. 같은 나물로 비빔밥 두 그릇을 만들어 보자. 한 그릇은 고추장으로, 한 그릇은 『시의전서』처럼 고춧가루·깨소금·참기름으로. 나물 맛이 어느 쪽에서 더 또렷한지 견주어 보면, 백삼십 년 전 부엌의 선택이 혀끝으로 이해된다.
한눈에 보는 연표
| 연도 | 기록 |
|---|---|
| 1614 | 『지봉유설』 남만초(고추), 왜겨자 |
| 1720년대(추정) | 『소문사설』 순창 고추장 |
| 1766 | 『증보산림경제』 고추장, 고춧가루 김치 |
| 1810 | 장혼 『몽유편』 비빔밥의 한글 표기 ‘브뷔음’ |
| 19세기 중반 | 『오주연문장전산고』 열두 갈래 골동반 가운데 고추장 골동반 |
| 1800년대 말 | 『시의전서』 부빔밥 — 고춧가루·깨소금·기름 |
| 1921~1948 | 근대 조리서 비빔밥 양념 — 고춧가루 |
| 1925 | 『해동죽지』 대구 장터의 헛졔사밥 |
| 1925·1929 | 『개벽』·『별건곤』에 진주 비빔밥 소개(전함) |
| 일제강점기 | 진주비빔밥 육회에 고추장(주영하의 견해) |
| 1952 | 전주 한국집 개업 |
| 1970 | 『조선요리』 — 조리서에 고추장 비빔밥 |
| 1976~1980 | 안동 헛제삿밥 상품화 |
| 1978 | 삼원식품(현 해찬들) 고추장 첫 시판 |
| 1997·1998 | 기내식 비빔밥, 머큐리상 |
| 2000년경 | 안동 헛제삿밥에 고추장 곁들임 |
참고: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산주자미변증설」(한국고전종합DB, 번역은 쿡톡 — 鱅魚 등 일부 물명은 확정하지 못함). 김유진·장대자(한국콘텐츠학회 2018). 진주: 경남신문(2023.3.8)·매일신문(2023.3.8)·영남일보(2017.6.30), 주영하의 견해는 ㅍㅍㅅㅅ(2017.8.14) 인용. 전주: 한식진흥원(2023.11.13)·지역N문화 「전주 한국집」·이태영 「전주 비빔밥과 방언」(『새국어소식』 2003.7). 고추장 시판: 굿모닝경제(2024.9.25). 기내식: 데일리안(2019.6.17). 『개벽』·『별건곤』 원문과 1896년 진주화반 기록은 직접 대조하지 못해 전하는 기록으로 적었습니다.
연재 「비빔밥은 어디서 왔나」
- ① 고추를 처음 본 조선 사람은 ‘독이 크다’고 적었다
- ② 고추장이 있었는데도, 130년 전 비빔밥은 고춧가루로 비볐다
- ③ 1925년 대구 장터에선 ‘가짜 제삿밥’을 팔았다
- ④ 비빔밥에 고추장이 ‘기본’이 된 건 생각보다 최근이다 (지금 읽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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