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어
추어죽(鰍魚粥) — 미꾸라지를 고아 거른 국물에 쌀을 넣어 쑨 죽. 가을철 보양식.
추수 끝난 논에서 건져 고아 쑤던, 백성의 가을 죽.
가을걷이가 끝나고 논에 댄 물이 빠지면, 진흙 속에 미꾸라지가 남습니다. 사람들은 그 미꾸라지를 잡아 푹 고고, 살을 발라 거른 국물에 쌀을 넣어 죽을 쑤었습니다. 추어죽 — 여름내 지친 몸을 가을에 추스르던, 논이 내준 죽입니다.
추(鰍)라는 글자 — 가을은 뜻이 아니라 소리였다
미꾸라지를 한자로 추어(鰍魚)라 적습니다. 고기 어(魚) 옆에 가을 추(秋)가 붙어 있으니 ‘가을에 맛이 드는 고기’라는 뜻이겠거니 싶고, 실제로 그렇게 풀이하는 글도 흔합니다. 그런데 자전을 펴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이 글자의 본디 꼴은 추(鰌)입니다. 『설문해자』는 이 글자를 두고 “고기 어(魚)를 따르고, 추(酋)가 소리다(从魚, 酋聲)”라고 풀었습니다. 한쪽은 뜻을 나르고 다른 한쪽은 소리를 나르는, 형성자의 얼개입니다. 뒷날 그 소리 자리에 음이 같은 가을 추(秋)가 대신 들어앉아 추(鰍)가 되었고, 『강희자전』은 이 글자에 대해 “추(鰌)와 같다”고만 적었습니다. 곧 秋는 뜻이 아니라 소리로 붙은 자리입니다.
글자를 쪼개어 뜻을 짜 맞추는 풀이는 언제나 그럴듯합니다. 다만 그럴듯한 것과 맞는 것은 다릅니다. 이 물고기가 가을에 좋다는 근거는 글자가 아니라 논에 있습니다.
서유구는 『난호어목지』와 『임원경제지』에서 이 물고기를 한자로 이추(泥鰍), 한글로 ‘밋구리’라 적고, 살에 기름기가 많아 맛이 좋으며 평민들이 이것을 잡아 푹 고아 국을 끓여 먹는데 별미라고 했습니다. 잡는 때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 벼를 거두고 논물이 빠진 직후, 그러니까 가을입니다. 이름이 계절을 일러 준 것이 아니라, 계절이 이름 옆에 나란히 놓였을 뿐입니다.
논이 내준 한 그릇
추어죽은 귀한 재료로 짓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과 도랑에서 누구나 잡을 수 있는 미꾸라지가 그 바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흔하다고 해서 손이 덜 가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잔뼈째 오래 고아 국물을 내고 다시 걸러 내는 조리법이라, 살만 발라 먹는 여느 생선과는 다루는 방식부터 달랐습니다.
원문 그대로
鰍魚 믜꾸리
性溫, 味甘, 無毒. 補中止泄.
形短小, 常在泥中. 一名鰌魚. 《入門》
1613년에 간행된 『동의보감』 탕액편 어부(魚部)에 실린 미꾸라지 항목의 전문입니다. 옮기면 이렇습니다.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속을 보하고 설사를 멎게 한다. 모양이 짧고 작으며 늘 진흙 속에 있다. 일명 추어(鰌魚)라 한다.”(쿡톡 옮김) 끝에 붙은 《入門》은 이 대목을 어느 책에서 가져왔는지 밝힌 출처 표시로, 명나라 의서 『의학입문(醫學入門)』을 가리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표제 옆의 한글입니다. 한문 의서인 『동의보감』은 재료 이름마다 백성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달아 두었는데, 이 자리에 적힌 것은 믜꾸리. 오늘의 ‘미꾸리’가 사백 년 전 책장에 그대로 앉아 있는 셈입니다. 서유구가 적은 ‘밋구리’와 나란히 놓으면, 이 물고기를 부르던 옛 입말의 결이 어렴풋이 잡힙니다.
임금의 죽과 백성의 죽
같은 보양죽이라도 그 자리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유로 쑨 타락죽이 내의원에서 쑤어 대궐로 올리던 죽이었다면, 추어죽은 논에서 손수 잡은 것으로 끓여 온 식구가 나누던 죽이었습니다. 미꾸라지는 조선에서 하찮은 물고기로 여겨져 아예 진상품 목록에 들지 못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추어’라는 말도 음식이 아니라 진흙에 사는 보잘것없는 존재를 빗대는 비유로만 쓰였습니다. 한쪽은 진상을 받아 들었고, 다른 한쪽은 직접 흙탕물에 손을 담가 건졌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먹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서유구가 “평민들이 잡아 푹 고아 국을 끓여 먹는데 별미”라 적은 그 한 줄이, 진상 문서 어디에도 없는 한 그릇의 자리를 대신 증언합니다. 가장 흔한 진흙 속 물고기가, 가장 든든한 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추어죽은 가을이 백성에게 내어 준 몫이었습니다.
곁들임 · 미꾸라지로 끓이는 것들
- 추어죽 = 미꾸라지를 고아 거른 국물에 쌀을 넣어 쑨 죽.
- 추어탕 = 미꾸라지를 갈아 끓인 탕. 경상·전라식.
- 추탕 =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끓인 탕. 서울식.
- 추두부탕(鰍豆腐湯) =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적어 둔 옛 조리법. 해감한 미꾸라지를 두부와 함께 솥에 넣고 불을 때는, 이름부터 기이한 한 그릇.
낱말 풀이
- 추어(鰍魚)·추어(鰌魚) — 미꾸라지·미꾸리를 이르는 한자 이름. 鰌가 본디 꼴이고 鰍는 소리 자리를 바꿔 쓴 같은 글자.
- 이추(泥鰍) — 진흙(泥)에 사는 물고기라는 뜻. 서유구가 쓴 표기.
- 형성자(形聲字) — 뜻을 맡은 글자와 소리를 맡은 글자를 합쳐 만든 한자. 한자의 대다수가 이 방식이다.
- 탕액편(湯液篇) — 『동의보감』에서 물·곡식·물고기·채소·풀 등 재료 하나하나를 다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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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의 서술이며 오늘의 의학·영양 정보가 아닙니다. 참고: 『동의보감』 탕액편 어부(1613, 원문 대조는 한의학고전DB 및 위키문헌 전사본), 『설문해자주』·『강희자전』(한전 zdic.net), 조선왕조실록사전 ‘추어(蝤魚)’ 항목(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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