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자로 온 복숭아는 사흘 뒤 더 달아지고, 포도는 그대로다. 따고 나서도 익는 과일과 따는 순간 멈추는 과일을 가르는 기체 하나, 에틸렌. 1934년 사과에서 확인된 익음의 신호와, 농가와 부엌이 나눠 갖는 이틀에 대하여. 「미식 사전」.
「미식 사전」 — 세계 음식과 조리의 말을 한 낱말씩 풀어 읽습니다. 이번 낱말은 상자 안에서 벌어지는 일, 후숙입니다.
같은 날 같은 상자로 온 두 과일이 있다. 복숭아는 사흘 뒤 향이 올라오고 손끝에 눌린다. 포도는 사흘 뒤에도 딴 날의 맛 그대로거나, 조금 물러졌을 뿐 더 달아지지는 않는다. 한쪽은 상자 안에서 계속 익고, 한쪽은 가지에서 떨어진 순간 멈춘다.
따고 나서도 익는 과일
후숙(後熟)은 글자 그대로 ‘뒤에 익음’이다. 수확 뒤에 익음이 이어지는 과일에만 쓰는 말이다. 과일은 여기서 두 무리로 갈린다. 따고 나서도 익는 쪽과, 따는 순간 익음이 끝나는 쪽. 앞쪽에 복숭아, 사과, 배, 바나나, 토마토, 키위, 감, 아보카도가 있다. 뒤쪽에 포도, 감귤, 딸기, 체리, 수박, 파인애플이 있다.
과학은 앞쪽 무리에 이름을 붙였다. 클라이맥터릭(climacteric), 익어 가는 마지막에 숨이 가빠지는 과일이라는 뜻이다. 이 과일들은 익을 때 호흡이 급격히 늘고, 스스로 에틸렌이라는 기체를 내놓는다. 에틸렌은 익으라는 신호다. 신호가 돌면 전분은 당으로 바뀌고 세포벽은 풀리고 향이 만들어진다. 나무에서 떨어져도 신호는 멈추지 않는다.
뒤쪽 무리는 이 신호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포도의 당은 나무가 넣어 준 만큼이 전부다. 딴 뒤에는 수분이 빠지고 조직이 물러질 뿐, 단맛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포도는 다 익은 것을 따야 하고, 복숭아는 조금 덜 익은 것을 따서 보낼 수 있다.
사과 한 알이 상자를 익힌다
1934년, 영국의 리처드 게인은 사과가 내놓는 기체를 모아 그것이 에틸렌임을 확인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이유를 모른 채 경험만 갖고 있었다. 익은 사과 옆에 둔 바나나가 빨리 노래지고, 창고의 감이 한꺼번에 무른다는 것을. 기체 하나가 상자 하나를 익힌다. 덜 익은 아보카도를 사과와 봉지에 넣어 두라는 오늘의 부엌 요령은 그 실험의 후손이다.
반대로 쓸 수도 있다. 오래 두고 싶은 과일은 사과에서 떼어 놓는다. 냉장은 호흡을 늦추고, 낮은 온도는 에틸렌의 일을 더디게 한다. 후숙시키고 싶은 것은 상온에, 멈추고 싶은 것은 냉장에. 부엌의 두 자리는 사실 기체의 속도를 고르는 자리다.
상자 안의 이틀
복숭아를 단단한 채 보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른 복숭아는 길을 견디지 못하고, 단단한 복숭아는 상자 안에서 마저 익는다. 산지는 익음의 앞부분을 맡고, 받는 사람의 부엌이 뒷부분을 맡는다. 후숙은 그러니까 농가와 부엌이 나눠 갖는 시간이다. 상자를 열었을 때 단단하다면 덜 자란 것이 아니라, 아직 당신 몫의 이틀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어떤 과일은 떠난 뒤에도 자란다. 어떤 과일은 떠난 자리가 끝이다. 과일마다 마지막을 어디서 맞을지가 정해져 있다.
낱말 풀이
- 후숙(後熟) — 수확 뒤에 이어지는 익음. 클라이맥터릭 과일에서만 일어난다.
- 클라이맥터릭(climacteric) — 익을 때 호흡이 급격히 늘고 에틸렌을 스스로 내는 과일. 복숭아·사과·바나나·토마토·키위·감·아보카도.
- 비클라이맥터릭 — 따는 순간 익음이 끝나는 과일. 포도·감귤·딸기·체리·수박·파인애플.
- 에틸렌 — 식물이 내는 기체 호르몬. 익음의 신호. 1934년 사과에서 확인됐다.
참고: 클라이맥터릭 분류와 에틸렌의 역할은 일반 원예·식품과학 문헌을 따랐습니다. 과일별 분류는 품종과 자료에 따라 경계가 조금씩 다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식품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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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2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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