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장 경락표 품목 칸에는 「사과」만 있고 「능금」은 없다. 그런데 19세기 말 상주에서 쓴 『시의전서』는 단것 목록에 사과와 능금을 나란히 따로 적었다. 같은 과일의 두 이름이었을까, 다른 두 과일이었을까.
9월 마지막 날, 문경 공판장. 10kg 사과 상자 위 경락표 품목 칸에 「사과(기타)」라고 찍혀 있다. 품종 이름 대신 ‘기타’다.
경매장을 한 바퀴 돌아도 품목 칸에 「능금」은 없다. 사과는 품종으로 나뉘어 적히고, 능금이라는 말은 이 종이 위에 자리가 없다.

『시의전서』의 당속 물목
19세기 말 상주에서 쓴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단것 갈래를 모은 당속(糖屬) 물목이 있다.
사탕, 옥춘당, 오화당, 용안, 여지, 귤병, 당대추, 호두, 잣, 은행, 황률, 건시. 그리고 끝에 세 가지가 붙는다. 사과, 능금, 포도.
원문 그대로는 「사과 능금 포도」다. 사과와 능금이 한 줄에 나란히, 따로 적혔다.
두 과일이 어떻게 달랐는지 책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절 상주의 부엌에서 사과와 능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두 가지였다.
능금이라는 이름
능금은 오래된 이름이다. 매일신문의 대구 사과 산업사 기획(2006)은 고려 때 송나라 사람이 우리말을 적은 『계림유사』(1103)에 林檎(임금)이 나온다고 소개하고, 능금이 이 ‘임금’에서 변한 말이라고 설명한다.
예부터 이 땅에서 길러 온 재래종 능금과 오늘 우리가 먹는 사과는 식물학에서도 따로 나눈다. 재래 능금은 Malus asiatica, 지금의 사과는 Malus domestica다.
서양 사과가 들어온 해
지금 시장의 사과, 홍옥과 국광에서 부사와 감홍으로 이어지는 사과는 개항 뒤에 들어온 나무에서 시작한다. 들어온 해는 여러 설로 전한다.
1883년 인천 미국영사관 뜰에 관상용으로 심은 것이 처음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84년 무렵 외국 선교사를 통해 각 지방에 몇 그루씩 들어왔으나 대부분 관상용이었다고 적는다.
대구에서는 1899년 미국인 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이 고향 미주리에서 묘목을 주문해 사택에 심은 것을 대구 사과의 시작으로 꼽는다. 다른 선교사를 꼽는 연구도 있다.
과수원으로 키워 팔기 시작한 것은 1901년이다. 윤병수가 미국 선교사를 통해 묘목을 많이 들여와 원산 부근에 과수원을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경제적 재배의 시작으로 본다.
이름이 옮겨 갔다
새 과일이 들어오자 옛 이름이 그 위에 얹혔다. 해방 뒤 전국에 이름난 대구 사과는 오래 ‘대구 능금’으로 불렸고, 대구에는 「능금꽃 피는 고향」이라는 노래가 있다.
『시의전서』가 나란히 적었던 두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다 건너온 다른 나무의 열매로 건너간 셈이다.
1924년 이용기가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능금술(임금주) 만드는 법이 있다. 익은 능금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뺀 뒤 즙을 짜서 물을 섞어 하룻밤 두면 찌꺼기가 가라앉는다. 맑은 윗물만 따라 꼭 봉해 한 해를 묻는다. 이 능금이 재래 능금이었는지 새로 들어온 사과였는지는 책이 가리지 않는다.
경락표의 빈칸
오늘 공판장에서 사과는 품종 이름으로 불린다. 홍로, 감홍, 부사. 이름을 대기 어려운 것은 「사과(기타)」로 묶인다.
『시의전서』의 한 줄에서는 사과와 능금이 나란히 섰다. 지금의 경락표에는 한 칸뿐이고, 능금이라는 이름은 대구의 옛 노래 제목 같은 데에 남았다.
참고: 『시의전서』 당속 물목(쿡톡 시의전서 원문 보관본·주석본). 매일신문 「대구·경북 근대화 100년 (8) 사과 산업」(2006-02-17, 계림유사·1883 인천·대구 능금). 매일신문 기고 「’능금꽃 피는 고향’ 노래비 건립에 부쳐」(2013-05-10, 1899 존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과」(1884·1901 윤병수·1906 원예모범장). 주간경향 「사과 — 우리 기호에 딱 맞는 으뜸 과일」(2008, 학명 구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임금주(전통식품 DB). 들어온 해는 자료마다 달라 전해 오는 설로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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