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없는 단맛의 기원 — 식탁에서 가장 귀하던 한 송이

한 송이가 다 비워질 때까지 저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 포도는 식탁 위에서 아주 귀한 자리였다.

내 어린 시절, 포도는 식탁 위에서 아주 귀한 자리였다.

기억 저편을 더듬어 보면 그 시절 과일은 늘 비슷했다. 사과와 감, 복숭아와 참외, 여름이면 수박. 사과 다음으로 자주 보았던 건 복숭아였고, 포도는 그보다 한참 뒤에 오는 과일이었다. 아무 때나 먹는 과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거쳐야 겨우 집 안으로 들어오던 여름의 손님 같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귀한 포도를 가장 먼저 우리 집으로 들고 오신 사람은 도시인 대구에 살던 이모였다.

대구에서 모동의 언니 집 — 내 어머니가 사는 골짝 마을 — 을 찾아오시던 길. 이모는 늘 무언가를 한 손에 들고 오셨다. 과자 상자일 때도 있었고, 빵 봉지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그 손 안에는 검보라색의 큰 알이 담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거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풍경이다. 산과 논뿐이던 시골집 식탁 위에, 도시를 건너온 낯선 포도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것. 그때 우리에게 포도는 밭에서 나는 과일이라기보다 누군가 먼 데서 들고 오는 여름의 맛에 가까웠다.

한여름 저녁, 그 거봉 한 송이가 식탁 가운데 놓여 있던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거봉은 지금 생각해도 참 느린 과일이었다. 껍질을 벗겨야 했고, 씨를 골라내야 했다. 입안에는 달콤한 즙이 퍼졌지만 마지막에는 늘 단단한 씨 두세 개가 남았다. 어린 나는 껍질을 뱉고 씨를 접시에 모으는 일을 마치 놀이처럼 여겼다.

포도 한 알을 다 먹고 나면 작은 흔적들이 식탁 위에 남았다. 보랏빛 껍질과 반질거리는 씨앗들. 그 느린 먹는 방식이 여름 저녁을 더 길게 만들어 주었다.

마루에서는 선풍기가 천천히 돌고, 텔레비전 소리가 멀리서 낮게 흘러왔다. 어른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포도씨를 작은 접시에 모으며 괜히 오래 식탁에 머물렀다.

대개는 껍질째 입에 넣고 껍질만 입 밖으로 밀어냈다. 어떤 어른은 포도씨가 몸에 좋다며 씨까지 꼭꼭 씹어 삼키기도 했다.

한 송이가 다 비워질 때까지 저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포도는 사람을 오래 식탁에 붙잡아 두는 과일이었다.


샤인머스켓이 등장한 뒤로 포도의 문법은 완전히 달라졌다. 연둣빛 알. 씨 없는 단맛. 껍질째 그대로 씹으면 끝이었다. 뱉을 것도 없고, 골라낼 것도 없었다. 한 알이 한 번의 호흡만큼 짧아졌다.

나는 처음 샤인머스켓을 먹던 날을 기억한다. 맛있다는 생각보다 조금 섭섭하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단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농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샤인머스켓은 오랜 교배 끝에 만들어진 품종이었다. 씨를 없애기 위해 사람 손이 여러 번 들어가고, 알을 크게 키우기 위해 송이 안에서도 몇 알은 잘라낸다. 남은 열매만 햇빛과 양분을 더 받는다. 단맛은 그 선택 끝에서 만들어진다.

한 송이의 반듯한 모양 뒤에는 누군가의 새벽과 손끝이 오래 붙어 있다.

씨앗이 사라진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자연이 남겨 둔 흔적 하나를 사람이 조용히 거두어들이는 일이니까. 그 위에 놓인 단맛을 우리는 아주 쉽게 먹는다.

그래서 가끔은 한 알을 입에 넣기 전에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단맛은 얼마나 많은 선택 끝에 여기까지 왔을까.


요즘은 써니돌체 같은 새로운 포도도 등장한다. 붉은빛의 샤인머스켓. 해마다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나고, 한때 식탁의 중심이던 품종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그래도 거봉이나 캠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시장 한쪽에는 여전히 그 느린 포도들이 남아 있다. 다만 예전처럼 맨 앞자리가 아닐 뿐이다.

포도를 먹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여름을 보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껍질을 벗기고, 씨를 고르고, 한 알 한 알 이야기를 이어 가던 저녁은 조금 짧아졌다.

그래도 아직 느린 과일을 찾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여전히 거봉 한 송이를 장바구니에 담아 돌아간다.

· · ·

오늘 저녁 식탁에 거봉과 샤인머스켓을 함께 올려 둔다. 천천히 머무는 단맛 하나와, 짧고 또렷한 단맛 하나. 두 개의 시간이 한 식탁 위에 나란히 놓인다.

나는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며 생각한다.

달라지는 맛 뒤에는 언제나 달라지는 사람의 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여름 저녁은 씨를 골라내던 그 느린 시간 덕분에 조금 더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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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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