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밥솥에서 김이 오르는 저녁. 그 한 공기 안에 봄의 볍씨와 여름의 바람과 가을의 들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밥솥이 김을 뿜습니다.
저녁 여섯 시 무렵이면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에서는 늘 비슷한 풍경이 반복됐습니다. 솥뚜껑이 열리고, 흰 김이 천장까지 한 번에 번져 오르던 순간. 그 안에서 갓 지어진 밥알들은 작은 빛을 머금은 채 통통하게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밥 한 공기를 몇 분이면 다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 그릇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꼬박 한 계절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한 공기의 밥 안에는, 누군가의 긴 계절이 들어 있습니다.
4월이 되면 아직 논은 비어 있습니다. 바람만 지나가고, 물도 들어오기 전의 마른 흙이 들판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의 시간은 이미 시작됩니다. 지난해 남겨 둔 볍씨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들을 골라 물에 담그고, 천천히 싹을 틔웁니다.
어린 싹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랍니다. 손가락만 한 초록빛 모가 되기까지 봄볕과 물이 조용히 지나갑니다.
그리고 초여름, 모들은 드디어 논으로 옮겨집니다. 그때부터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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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철의 논에는 오래 허리를 굽힌 사람들의 등이 보입니다.
요즘은 기계가 많은 일을 대신하지만, 좁은 논둑과 비탈진 자리에는 아직 사람 손이 남아 있습니다. 물에 잠긴 논바닥에 발을 디디고 한 포기씩 모를 심던 풍경.
6월 바람이 불면 어린 벼들이 한 방향으로 천천히 흔들립니다. 멀리서 보면 꼭 아이들 머리칼 같은 초록입니다.
여름은 벼에게 가장 긴 계절입니다. 햇빛이 너무 약해도 안 되고, 너무 뜨거워도 잎이 탑니다. 물은 필요하지만 오래 잠기면 뿌리가 상합니다.
농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특히 태풍 소식이 들리는 밤이면 잠이 깊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자란 벼들이 한순간에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7월과 8월의 논에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시간이 흐릅니다.
그리고 가을.
벼는 익을수록 천천히 고개를 숙입니다. 황금빛 들녘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계절. 논은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차고, 농부들의 손은 다시 바빠집니다.
벼를 베고, 말리고, 껍질을 벗기고, 긴 저장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흰 쌀이 됩니다.
마트 진열대 위의 쌀 한 봉지에는, 사실 아주 긴 계절이 접혀 있습니다.
하지만 밥이 되는 마지막 시간은 언제나 부엌에서 완성됩니다.
쌀을 씻고, 잠시 물에 불리고, 솥 안에서 천천히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어머니는 늘 미리 쌀을 불려 두셨습니다. 그 짧은 기다림이 밥맛을 바꾼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불을 끄고도 바로 뚜껑을 열지 않았습니다. 뜸이 드는 동안 쌀알은 마지막으로 제 모양을 완성합니다.
부엌의 시간은 늘 조금 느리고 조용했습니다.
밥 한 공기에는 대략 삼천 개가 넘는 쌀알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한 톨 한 톨은 봄의 볍씨였고, 여름의 바람이었고, 태풍을 지나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 오래 허리를 굽혀 살아낸 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으며 살지만, 가끔은 그 한 톨이 지나온 시간을 잊고 살아갑니다.
오늘 저녁 밥솥을 여시거든 잠깐만 김이 오르는 모습을 바라봐 주세요. 그 안에는 4월의 볍씨와 6월의 논바람과 8월의 긴 밤과 10월의 황금빛 들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새벽도 아직 따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밥 한 공기가 식탁까지 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고 깊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쩌면 쌀 한 톨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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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5 — c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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